교과서 검증제는 필요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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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학습 내용을 30% 가량 줄인 새로운 학습지도요령에 의거, 내년 봄부터 사용될 고교 교과서 검정 결과가 최초로 발표됐다. 이과 과목을 중심으로 지도요령의 기준을 초과한 기술(記述)이 대폭 삭제되는 등 '신축성있는 개혁'이 반영돼 지식의 경량화(輕量化)가 한층 더 진전됐다. 확산되는 학력 저하에 대한 불안감을 배경으로, 국가의 잣대 아래 일률적으로 학교현장을 묶어두는 교과서 검정제도 자체의 모순이 더욱 부각되게 만든 검정결과이기도 하다.

문부과학성이 지도요령의 위상을 종전의 '교육내용의 절대기준'에서 '최저기준'으로 바꾸는 등 신축성을 앞세운 개혁이 새 학습지도요령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 탓에, 교육현장의 혼란도 증폭되고 있다. 많은 기술이 삭제된 반면 일부는 지도요령 기준을 넘어섰는데도 '발전적 내용'이라 해서 검정을 통과하는 등 정합성(整合性)을 상실한 결과가 된 것도 이같은 혼란을 상징한다. 교과서 회사들도 당황해 하고 있다.

이번 검정에선 신청한 3백93점 가운데 3백87점이 합격했다. 불합격한 교과서 6점 중 3점이 생물교과서로, 탈락 사유로는 '지도요령을 초과한 기술'이 많았다. 학습지도요령을 '최저기준'으로 규정한 문부성의 새 방침이 교과서에 미처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교과서 검정은 전국적으로 고른 교육수준의 유지, 교육의 기회균등, 중립성 확보 등을 목표로 시행돼 왔다. 민간 교과서 회사가 편집한 것을 문부과학성이 심사하고 자문기관이 학습지도요령과 검정기준을 토대로 의견을 추가해 수정한 후 합격·불합격이 결정된다. 교과서 검정제도를 갖추고 있지 않은 미국과 유럽 대다수 국가와 달리 일본에서는 기술의 공정성을 겨냥한 검정제도가 종종 이데올로기 대립의 요인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교육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다양화하고 선택성(選擇性)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자녀들의 학습지침이 되는 교과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최소한도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신축성 있는 개혁'을 둘러싼 이번 혼란은 민간에서 자유로운 발상에 기초해 만든 제각각 다른 수준의 교과서를 학교나 가정 같은 현장에서 알아서 선택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검정제도의 폐지를 염두에 두고, 선택 방식을 포함한 심도있는 논의를 해야 할 때다.

일본의 검정제도는 민간에서 편집한 교과서에 국가가 간접적으로 간여하는 구조지만, 이는 대외적으론 '국정교과서'라는 이미지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인이 됐다. 이 때문에 역사교과서 기술을 둘러싸고 인근 여러 나라에서 비판이 제기돼 종종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하곤 했다. 국가에 의한 검정제도를 폐지하고 민간이 편집한 다양한 교과서를 교육현장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는 구조로 바뀐다면, 역사인식을 둘러싼 입장 차이나 오해에 따른 마찰이 줄어드는 효과도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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