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위기 自招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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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선의 계절이 왔다. 그것도 1992년, 97년 대선 때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의 몸짓에 봄을 느끼고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에 가을을 느낀다지만 정치부장으로서 대선이 시작됐음을 느끼는 것은 일반인들과는 다르다.

신문이나 방송 보도의 양이 늘어났다거나, '노무현(盧武鉉) 돌풍'이 불고 '이회창(李會昌) 대세론'과 '이인제(李仁濟) 대세론'이 안개처럼 스러지는 것을 먼저 접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그마한 기사에도 지지자와 반대자가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공정한 신문지면을 만들기가 쉽지 않음을 실감하는 순간 언론사의 대선은 시작되는 것이다.

최근 민주당 대선 경선주자인 이인제 후보에 의해 제기된 노무현 후보의 지난해 8월 1일 언론관련 발언 문제와 이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는 대선과 언론보도의 측면에서 정치학자와 언론학자의 연구대상이 될 것이다. 盧후보는 과연 그런 발언을 했는가, 李후보가 흑색선전을 하는 건 아닌가, 취재원의 '오프 더 레코드(비도보)'요청을 기자들은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가, 李후보에게 언론사 정보보고 문건을 건네주거나 지난해 8월 1일의 대화내용을 알려준 사람은 누구인가, 선거과정에서 나타나는 상대 후보에 대한 폭로를 어떤 기준으로 보도해야 하는가. 이 사건은 이런 다양한 문제를 포괄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盧후보가 "동아일보 사주 퇴진 또는 폐간""주요 언론사의 국유화""개혁을 위해서는 언론이 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유력한 대선주자의 언론관과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인식을 검증하는 차원에서 긴요하다. 사실이라면 盧후보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위험한 언론관을 가진 것이며, 발언을 해놓고도 부인하고 있다면 정직성에 문제가 있다. 또 사실이 아니라면 이런 의혹을 제기한 李후보는 정치를 그만둬야 할지 모른다. 거짓말은 대통령 후보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밝히는 방법은 유일하다. 참석했던 기자들이 똑바로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혹이 제기됐을 때 해당기자들이 소속된 언론사는 두 후보의 주장을 열거만 했다. 이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일부 언론사는 그 다음날 참석기자의 증언내용을 일부 소개했다. 그나마 "폐간 취지로 말한 것을 들은 것 같다는 참석자도 있었다"고 모호하게 말하거나, "폐간 발언이 있었으나 참석기자 중 한 사람이 진담이냐고 묻자 농담으로 웃어넘겼다"는 식의 주관적 진술에 불과했다. '웃어넘겼다'는 정도로 처리해야 할 대목을 '농담'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증언은 객관성을 상실한 것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워낙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기자라면 대선주자로 나설 것이 분명한 정치인의 주요 발언은 비보도 약속을 지킨다해도 기록하고 소속 언론사에 보고하는 것이 상식이다.

아예 증언조차 하지 않은 방송이나 신문사도 있었다. 비보도 약속을 준수한다는 명분을 갖다댔다. 비보도 약속을 지키는 것은 직업윤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온나라를 뒤흔든 이 사건의 진상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언론의 본질적 책무다.

어느 기자가 이날의 대화내용을 李후보에게 전달했다면 기자로서의 도덕성을 상실했다는 측면에서 지적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보도에는 우선 순위가 있다. 발언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최우선 과제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사실규명보다 '누가 李후보에게 전달했느냐'는 문제를 부각했다. 기사와 사설, 심지어 만평에서도 그랬다. 그러다보니 벌써 "어느 신문은 누구 지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언론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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