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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장애 딸 꿋꿋이 키운 손가락 전문醫 안병문 그의 이름은 '애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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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항시 눈에 넣어도 안아플 내 딸 경민아. 네가 있을 때만 해도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었는데 어느덧 20일이 지나 이곳은 온통 봄꽃 잔치판이구나. 하지만 아무리 진달래·개나리꽃이 흐드러져도 애비에겐 지난달 12일 저녁 서울 앰배서더 호텔에서 있었던 너의 CD 출반 기념회 때의 감격뿐이란다. 그날 그 자리엔 1백여명의 하객들이 자리를 함께 해주셨었지. 그 분들은 네가 피아노로 베토벤과 쇼팽을 연주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 그날 행사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단다. 그저 '돈많은 병원장이 딸에게 피아노나 시켜 또 잘난 척한다'고 생각했다는구나. 하지만 손가락이 없는 왼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너의 모습이 담긴 영상과 함께 너의 엄마가 인사 겸 설명을 곁들이자 얼마나 놀라는 모습들이던지….

나도, 엄마도 그동안 온갖 편견을 잘 참고 이겨내는 네가 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지만 막상 여럿이 지켜보는 데서 공증(公證)을 받는다 싶은 생각에 그만 목이 울컥하더구나. 그날 네 동생의 바이올린 축하 연주도 일품이었지. 경민아, 지금도 그 때의 장면이 눈에 선하게 밟히는 것을 어쩔 수가 없구나.

따지고 보면 지금 내가 너에게 이런 얘기를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것도 세월이 우리 편에 서서 고맙게 흘렀기 때문이란다. 사실 몸이 성치 못한 너를 낳고 너의 엄마와 함께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너에게 얼굴을 들지 못하겠구나.

이왕 내친 김에 지나온 세월에 대해 얘기해보자꾸나. 너도 어렴풋이나마 알겠지만 우리 집안은 몇 안되는 의료명문이지. 상(商)자 호(浩)자를 쓰시는 너의 증조부께선 종두(種痘)실시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선생과 함께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관립의학교 교관으로 계시면서 초대 한성의사회장(지금의 의협회장)을 지내셨고, 조부(安富浩·1922~79)께서도 성심병원장을 지내셨거든. 그 덕에 애비는 고교와 대학을 세칭 명문이란 데를 거쳐 가업을 잇게 되었지. 1976년 대학을 마친 뒤 할아버지가 계시던 병원에서 수련의를 거쳐 서른한살에 수련부장을 할 정도로 잘 나갔단다. 너의 엄마도 바로 거기서 처음 만났단다. 부산에서 간호대를 나와 그 병원에 취업 중이었어. 엄마는 얼마 안있어 미술을 공부하겠다며 노르웨이로 유학을 떠났다가 핸디캡 디자인 석사과정을 마치고 5년 만에 귀국했단다. 우리가 82년 말에 결혼을 했으니 7년 만에 사랑의 열매를 맺은 셈이지.

왼손이 조금 작은 게 아니라…

하지만 이듬해 내가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엄마도 내 근무지인 원주로 와 살림을 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우리의 아기가 태어난다는 기대에 힘드는 줄 모르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단다. 산일이 가까워 엄마는 내가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했고 나도 곁을 지켰지. 그런데 노산(産)이라 그런지 진통을 시작하고 하루가 지나도 소식이 없는 거야. 결국 출산을 했는데도 담당의사가 아무 얘기를 안해주는 게 이상해 간호원한테 물어보니 "산모도, 아기도 모두 건강한데 다만 왼손이 작다"는 거야. 아기 손이니 작은 게 뭐 대수겠나 생각하고 사내앤지 계집앤지도 모른 채 너를 찾아가 보지 않았겠냐. 순간 나는 내 눈을 몇번이고 의심했더란다. 손이 그저 작은 게 아니라 엄지와 새끼손가락이 한마디 있는 것 말고는 보이지 않으니 어쨌겠냐. 온갖 자책을 하며 마음을 가누려 했지만 너의 유난히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그만 병실을 뛰쳐나오고 말았단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밖을 방황하다 자정 무렵에야 마음을 다잡고 너의 엄마를 찾아가니 역시 그때까지 모르고 있더구나. 가까스로 사실을 말해줬더니 역시 충격을 받은 듯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더구나. 하지만 이내 "당신은 뼈를 다루는 의사이고 나는 장애인을 위한 공부를 한 사람이니 앞으로 이들을 위해 살아가도록 계시의 징표를 준 것 아니겠느냐"며 위로를 하더라. 나중에 실토를 하더라만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속으론 옆에 누운 아이가 내 아이였으면 했다는 거야. 둘 다 지독한 이기적인 생각뿐이었지. 또 네 외할머니가 오셔서 돌봐주셨는데 누가 볼세라 숨겨 키우셨지. 이사도 여섯번이나 다녔으니까.

하느님이 특별히 주신 것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기까진 2년여가 걸리더구나. 제대가 가까워지면서 진정으로 네가 장애아가 아닌 딸로 보이기 시작한 거야. 지인의 도움으로 서울 금호동에 병원을 차렸을 무렵이니까 네가 우리 식으로 네살 때일 거다. 어느날 갑자기 네가 "왜 내 손은 이렇게 작으냐"고 물어 엄마가 "하느님이 훌륭한 일을 하라고 특별히 주신 것"이라고 말해주자 고개를 끄덕이더라는 얘기를 전해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무렵부터 엄마는 너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지. 어린 나이에 온전한 손으로도 힘든데 부족한 손가락으로 찍듯이 쳐야 하니 네가 싫어한 것도 당연하지. 그럴 때마다 "남보다 작은 손가락으로 해내야 훌륭한 사람"이라며 채근하면 고통을 참아가며 따라주는 네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단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기형아'니 '손귀신'이니 하는 친구들 놀림에 밝은 표정을 잃지 않는 것이 때론 잔망스러울 정도로 너는 꿋꿋했었지. 네가 5학년 때 전교 피아노 경연에서 우수상을 받았을 때보다 애비가 더 놀란 건 그 불편한 손으로 손톱만한 종이학을 접어대는 걸 보고서였어. 그래서 네가 피아니스트 대신 의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말리지 않았던 게다.

너를 통해 배운 게 너무 많아

솔직히 98년 중3인 너를 미국에 유학보낸 것도 아직까지 이 사회가 장애인을 꺼리기 때문에 보다 자유롭게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함이었단다. 네가 가자마자 코네티컷주 경연에 대표로 선발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미국이라 가능했을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드는구나. 어쨌거나 네가 이제 의사가 되기 위해 이미 몇군데 대학에 합격해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니 기쁘기 한량없구나. 그래도 애비의 마음엔 대학에 가서도 피아노를 계속했으면 싶다. 너도 언젠가 얘기했듯이 피아노가 없었으면 오늘의 네가 있었겠니. 마음 같아선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것도 보고 싶단다.

아 참 깜빡했는데, 요즘 장애인 돕기 사업도 열심이란다. 93년 지금의 성민병원으로 옮겨온 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맞아 병원을 살리기 위해 고생하던 중 "아빠 엄마가 변했다"는 네 말을 듣고 대오각성한 덕이다. 그동안 병원 키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장애인을 위한 재단설립'이란 당초 목표를 잊고 살았었는데 초심으로 돌아가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고 맘먹은 게 장애인을 비롯한 불우 이웃에 대한 무료 치료란다.

애비는 정말 너를 통해 배운 게 너무 많구나. 온전한 몸뚱이를 가진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상처받은 이웃이 왜 결코 남이 아닌지, 의미있게 사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된 게 모두 네 덕분이다. 나의 사랑하는 딸아, 너는 바로 나이고 나는 너의 애비다. 몸 건강히 잘 있거라."

이만훈 전문기자

이 땅의 아버지들은 스스로를 '애비'라 부른다. 뭔가 부족함에 대한 자탄이지만 그 도량은 깊고 너른 호수와 같아서 누구라 돌을 던져도 이내 파문을 감춰들이고 만다. 그래서 그네들 마음의 빛깔은 늘 무채색인지도 모른다.

인천시 서구 석남동 성민병원 안병문(安秉文·52)원장도 이같은 우리네 애비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에겐 아내 이미숙(美淑·50)씨와 두 딸이 있다. 큰 애가 선천성 단지(短指)를 갖고 태어난 경민(景玟·19·미 노스필드고 3년)이고 둘째는 10년이나 터울진 하영(河瑛·9)이다. '손가락 도사'를 자처하는 정형외과 전문의로 딸의 조그만 신체 결함 앞에 무력하기만 했던, 그러나 열아홉해 만에 끝내 그 딸을 '작은' 피아니스트로 키워내고 만 그런 사람이다. 아내에게 공을 돌리고 싶겠지만 자신과, 그리고 세상과 소리없는 전쟁을 벌이느라 속이 숯 검댕이 되었을 법한 그다.

지난달 CD 출반 기념독주회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딸에게 그가 '애비의 마음'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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