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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술이 뭐기에…뛰고 뛰고 또 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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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황 선생, 오늘 방학했잖아요. 그동안 언제 우리가 술 한번 제대로 마신 적 있어요. 오늘 한번 맘 놓고 마셔봅시다. 그야말로 송년회 아닙니까. 묵은 때를 벗겨보자고요."

동료 교사들이 권하는 술잔이 쏟아져 들어왔다. 처음엔 적당히 잔만 들어 마시는 시늉을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 어차피 대리운전해야 할 거라면 에잇.

내 주량은 소주 반 병이다. 하지만 오후 9시쯤엔 이미 한 병을 넘어서고 있었다. 어렴풋이 11시까지는 호기롭게 술잔을 들이켠 생각이 나지만 그 이후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비몽사몽간에 잠시 눈을 떠 살펴보자 동료 교사가 운전하고 있었다. 그리곤 또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아침 콩나물국으로 쓰린 속을 간신히 다스린 뒤 차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평소 조깅을 즐겨 하던 나는 운동도 할 겸 뛰어가기로 작정했다. 집에서 5㎞ 정도이니 30분이면 충분할 듯 싶었다. 찬 공기를 많이 마시면 숙취도 더 빨리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힘차게 달렸다. 속은 쓰렸지만 머리는 개운했다. 드디어 어젯밤 송년회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눈을 씻고 봐도 내 차는 눈에 띄지 않았다. 도난신고라도 해야 하나. 달리기를 할 때보다 더 가슴이 뛰었다. 주인 아주머니한테 물어봤지만 그 많은 손님의 행적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혹시나 하고 집에 전화했다. 그런데 집사람 왈,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내 차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어젯밤 친절하게 나를 데려다 준 사람은 직장 동료가 아니라 대리운전자였다니.

차는 온전해 다행이지만 이제 5㎞나 되는 거리를 어떻게 돌아가지. 조깅 복장으로 나와 돈 한푼 없는데. 고민 끝에 집에 가서 요금을 지불할 심산으로 택시를 탔다. 그런데 이게 또 웬 낭패인가. 아파트 문이 잠겨 있고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택시기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다급한 나머지 경비 아저씨한테 돈을 꿔 택시비를 냈다.

한숨 돌리는 순간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화장실에서 넘어진 막내아들이 머리에 상처를 입고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아내의 말이었다. 나는 차를 몰고 병원에 가려고 지하 주차장으로 달렸다. 그러나 세상에…. 나는 내 차 앞에서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내 차 주변은 온통 음식물 찌꺼기 통을 뒤엎어놓은 듯했다. 떨리는 다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문을 연 순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벗어놓은 상의 점퍼와 의자 안쪽 깊숙한 곳까지 뒤범벅이 된 토사물. 나는 비실비실 차에서 멀어져 주차장을 걸어나왔다. 그러고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뒤 응급실로 달려야 했다. 꼭 1년 전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속이 메스꺼워지는 내 인생 최악의 송년회 기억이다.

황성하(42.중학교 교사.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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