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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이중섭·윤이상·김춘수… 벚꽃 흩날리는 창가서 예술과 사랑을 읊던곳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1952년 진해 시내 8거리에 '칼멘'이란 상호로 문을 연 흑백다방(55년 개명)은 유치환·이중섭·윤이상·서정주·김춘수 등 일급 예술가들이 찾아오던 곳이다.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클래식 음악감상실이자 화랑과 연주회장을 겸하는 곳이었기에 이런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었다.

82년까지 군항제 기간이면 흑백다방에서 어김없이 열렸던 흑백 시화전은 경남 지역 시인들의 마음을 울렁이게 했던 화제의 현장이었다. 그러다 지난 20년간 중단됐다. 무관심과 갈등, 그리고 한 번 멈춘 것이 관성의 힘으로 작용했다. 그 사이 시인들은 하나 둘 진해를 떠났다.

그 흑백시화전이 지난 1일 20년 만에 다시 열렸다. 진해 출신으로 현재 울산에 거주하고 있는 정일근 시인이 "함께 뭉치자"고 제안했고, 여러 사람이 화답했다. "진짜가?"라고 했다가 "내 후딱 보낼게"라는 e-메일을 보낸 이는 진해에서 저 멀리 키르기즈스탄 공화국으로 이주한 최근봉 시인. 그가 이번에 출품한 시 "키르기스스탄에서 내 마음의 흑백다방까지/나는 낙타를 타고 돌아가련다"('내 마음의 흑백다방' 중)에서 시화전 이름을 따왔다.

'추억의 흑백다방 시화전-나는 낙타를 타고 진해로 간다'는 진해문인협회와 진해를 사랑하는 시인이 함께 주최한다. 시화전이 끝나는 9일 저녁에는 참여 시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참가한 시인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성흥사 가는 길'의 이월춘, '진해에 왔습니다'의 김일규, '내 처가 진해'의 김홍식씨 등은 진해를 지키고 있는 시인들. 다음이 진해가 고향인 출향(出鄕) 시인들이다. 진해문인협회장을 역임한 배기현 시인을 좌장으로 고영조·박문수·정이경·김승강씨 등이 그들이다. 마지막으로 흑백다방과 인연을 쌓은 시인들로 오하룡·이상개·이수익·이성복씨 등이 흔쾌히 시화를 보내왔다. 그들은 진해에서 해군으로 복무하거나 군무원으로 일하다 흑백다방과 인연을 맺게 됐다.

"진해 흑백다방 생각하는 날은/가만가만 그리운 이름 불러보는 날이다/해군중사 박재동 시인/개척 교회 목사 지일규 시인/잉여촌 동인 토박이 방창갑 시인/이슬처럼의 황선하 시인/그리고 영원한 함경도 기질의/유택렬 화백/그리워 그리워 불러보는 날이다."(오하룡 '흑백다방 생각하는 날은' 전문)

지난달 30일 시화전 준비를 위해 벽에 못질도 하고 얼굴도 볼 겸 내려온 '선발대'는 흑백을 추억하며 소주를 들이켰다.

"우리 어무이는 아직도 시내 시장에서 아구찜집 하고 있심더. 낼 아침은 우리 집에서 묵읍시더. 등단도 하기 전에 얼라들하고 흑백다방에서 시 끄쩍거리고 했었는데…. 와, 방창갑 선생님 보고싶네."(정일근)

"여는 일반 다방하고 달랐다카이. 60년대에 아주 예쁜 아가씨 한 명이 일을 돌봐주고 있었거든. 옆에 앉고 이런 거는 택도 없었데이. 여러 시인들, 화가들 그 아 본다고 죽치고 있었던기라. 근데 어느날 한 남자한테 가버린기라. 당시 해군사관학교에서 법학 가르치던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검찰총장이 됐데이. 얼마 전 두 부부가 TV에 나오는 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배기현)

지금 흑백다방은 창업자 유택렬 화백(99년 작고)의 둘째딸인 피아니스트 유경아(37)씨가 홀로 지키고 있다. 그녀는 매달 첫째주 토요일 저녁 다방에서 '해설이 있는 음악회'를 열고, 매년 연극을 두세차례 상연하면서 이곳을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진해=글·사진 우상균 기자

벚꽃이 팝콘처럼 부풀었다 눈발처럼 흩날렸다. 외출 나와 꽃길을 거닐던 수병(水兵)들이 애인의 어깨에 한쪽 팔을 걸치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4월의 진해(鎭海). 남쪽 바다를 거쳐온 봄바람이 마음을 데우는 진해는, 계절이 겨울의 허물을 뱀처럼 벗는 곳이다. 그리고 진해에는 흑백다방이 있다. 올해로 40회를 맞은 군항제보다 역사가 더 오래된 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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