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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은 자기 소리를 얼만큼 잘 죽이느냐를 배우는 과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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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호 12면

코리아남성합창단이 1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원더걸스의 ‘텔미’를 부르며 드레스리허설을 하고 있다. 신동연 기자

지난 16일 오후 8시30분 서울 광진구 선화예중·고 내 선화홀. 직장인들로 구성된 ‘코리아남성합창단’의 최종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문을 열고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피아노 반주자를 제외하고는 지휘자고 단원이고 온통 남자들이다. 모두 75명이었다. 나이는 20대부터 70대까지. 직업도 각양각색이었다. 한의사·안과의사에서 인테리어 회사 사장, 디자이너, 골퍼, 공학박사가 망라됐고 증권·보험·은행맨에 교회 목사와 장로, 교장 선생님과 교사도 있었다. 대부분 양복 상의를 벗고 넥타이를 푼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직장을 마치자마자 달려온 티가 났다.

입 맞추는 재미에 푹 빠진 ‘코리아남성합창단’ 단원들

그들은 이틀 앞으로 다가온 합창단 최대 행사인 제11회 정기연주회(18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를 위해 마지막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휘는 합창단 창립자이자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인 유병무(73) 전 선화예고 교사와 전문위원장인 윤종일 전 동덕여대 교수가 맡았다.

유씨는 1970년대 선화예중·고를 다닌 소프라노 신영옥·조수미씨에게 가곡과 성악의 기초를 가르친 당사자다. 일반인 남성합창 지휘 경력이 40여 년이다. 2008년 뇌경색이 오는 바람에 지난해 정기연주회 지휘를 못했지만 올해 다시 지휘봉을 잡았다. 이들은 레퍼토리에 포함된 곡들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음정·박자·소리의 셈여림을 맞추고 또 맞췄다. 시간이 갈수록 테너 1, 2팀과 바리톤·베이스팀 등 4개 파트의 남자들이 빚어내는 남성 4부 합창의 소리가 다듬어지고 있었다.

한의사 조월태(오른쪽)씨가 공연 시작 30분 전 콘서트홀 정문에서 펼쳐진 깜짝이벤트 때 관객에게 초대편지를 주고 있다.

코리아남성합창단은 99년 창단, 이듬해 3월 예술의전당에서 창단공연을 했다. 이후 10년째 같은 장소에서 객석이 가득 찬 가운데 정기연주회를 열었다. 활동 경력도 화려하다. 2002년 부산의 세계합창올림픽 때 일반합창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2003년 일본 오사카 이즈미홀에서 9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알마마타 남성합창단과 합동으로 공연했고 2007년엔 미국 워싱턴DC 청소년재단 초청 연주회를 했다.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100여 차례 연주회를 열었다. 58년 창단된 ‘한국남성합창단’과 함께 국내 아마추어 남성합창의 양대 산맥으로 통한다.

한의사이자 합창단 멤버인 조월태(56)씨가 가사를 쓰고 작곡가 이순교씨가 곡을 붙인 ‘짜장면’이라는 노래 연습이 시작됐다.

“찌글찌글찌글찌글찌글(주방장 아저씨) 짜장짜장 볶아대던 소리, 짜장면
후루룩 쉬업 첩(짭짭짭짭짭) 동네 아이들 붉게 코 적시며 짜장면 먹던 소리
(동네 아줌마들 곗돈 거두면서) 짜장면 먹던 소리
(동네 아저씨들 고량주 마시며) 짜장면 먹던 소리
그 소리, 그 맛, 그 이름 찾아주세요
(중략)
자장가가 짜장가가 아니듯 짜장면은 자장면이 아니라오. 그 이름을 돌려주세요.”

‘짜장면’의 법적 표기를 ‘자장면’으로 하기로 한 정부 방침에서 모티브를 잡았단다. 악보만 25쪽에 이르는 대작이다. 다양한 의성어를 구사해 마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장면을 앞에 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조씨는 서울 방배동에서 ‘단한의원’을 운영하는 한의사다. 하지만 정기 모임이 있는 매주 목요일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는 합창단 테너로 변신한다. 그는 “원광대 한의대를 다닐 때 남성4부 합창단을 창단해 지휘했었다”며 “꾸준히 써온 시에 작곡가가 곡을 붙여 만든 남성합창곡이 ‘짜장면’ ‘노인과 바다’ 등 6곡”이라고 말했다. 합창의 좋은 점을 묻자 “스트레스 해소엔 최고”라며 “합창이나 시 등 예술활동이 좌뇌와 우뇌를 고루 발달시켜 통찰력을 키워주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좋은 처방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남성 합창에는 혼성 합창이 따라 오기 힘든 중후한 맛이 있어서 매력이 있다고 했다.

합창단 총무인 김태경(50·선화예중 영어교사)씨는 “남성합창은 중독성이 있다”며 “담배하고 술·골프는 다 끊었는데 이것만은 못 끊었다”고 했다. 그는 “단원들이 목요일을 주일처럼 기다리고 지킨다”며 “60명이 넘으면 그랜드 코럴이라고 해서 오케스트라에 비견되는데 이번 무대에 75명이 선다”고 자랑했다. 그와 합창단에서 만나 단짝이 된 김용운(50) 이즈디자인 소장은 “합창은 비즈니스에서 찌든 시름을 잊게 해준다”며 “고상하게 얘기하면 영혼이 위로받는 느낌”이라고 했다. 체육대를 나온 그는 “남성합창의 매력은 파워”라고 말했다.

“합창의 관건은 서로 자기 소리를 얼만큼 잘 죽이느냐예요. 여러 사람이 한 음, 한 빛깔을 내는 데 독창과 다른 묘미가 있어요. 75명이 모여 얼마나 큰 소리를 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작은 소리를 내느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한 명이라도 튀면 소리가 삐끗해 버려요.”

강태희(60)씨와 아들 재훈(34·회사원)씨는 부자가 함께 무대에 선다. 강씨는 천안시 목천면에 사는데 최종 리허설에 참석하려고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왔다고 했다. 그는 리허설이 끝나기 직전, 버스가 끊기기 전에 가야 한다며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단원들 간 호칭은 나이 차이가 얼마든 ‘형님’ 아니면 ‘동생’이다.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4개월 전부터 일주일에 3일을 만나 맹연습했다. 곡당 80~90번씩 불렀다. 보통은 레퍼토리를 골고루 연습하지만 어떤 때는 한 곡만 가지고 2시간 연습한 적도 있다고 한다. 남자들만 있어서 재미가 없을 것 같다고 했더니 “오히려 그게 묘미”라고 한다. 합창 속으로 빠져들 수 있어서란다.

합창에 미친 가장을 가족들도 미워하지 않는단다. 폭탄주와 여자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실질적 혜택도 있다. 합창단원이나 단원의 자녀가 결혼을 하면 신랑·신부 입장, 축가 등의 전 과정에서 연주회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장례식장에도 찾아가 조가도 불러준다. 처음 들어오는 신입단원에겐 레슨을 해준다. 합창에 어울리는 소리와 빛깔을 가질 때까지 가르치는 데 통상 2~3년은 걸린다고 한다. 단원들끼리는 ‘목소리 힘 빼는 데 3년, 타인의 소리 들리는 데 3년, 지휘자 손끝 표정 알아차리는 데 4년. 그렇게 10년 세월이 훌쩍 갔다’는 얘기도 한다.

리허설이 끝날 무렵, 단원 전원에게 ‘연주 당일 유의사항’이란 자료가 배포됐다. 거기엔 ‘공식행사 종료 때까지 과도한 음주 자제 요망’ ‘객석의 연인에게 혼자 아는 척 신호 보내지 않기’ 등이 적혀 있었다.

공연 당일인 18일 오후 7시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로비 앞에서 합창단원들의 2분 게릴라콘서트가 열렸다. 관객들에게 꽃과 편지를 나눠주는 이벤트를 펼쳤다. 편지에는 무대에서 나를 찾아봐 달라는 애교 섞인 글귀가 적혀 있었다. 30분 뒤 본 공연이 시작됐다. 올해도 만석이었다. 복음성가·흑인영가를 필두로 ‘그대 그리고 나’ ‘슬픈 인연’ 등 가요, 영화 ‘하이눈’ ‘미션’에 삽입됐던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가 남성합창으로 불렸다. 거듭된 앙코르 요청에 이들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원더걸스의 히트곡 메들리를 율동과 함께 부르자 객석이 들썩거렸다. 합창을 통해 하나됨을 꿈꾸고 그 꿈을 이뤄가는 그들이 ‘원더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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