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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코미디 영화 '승승장구' : 웃고만 싶은 大衆 "더 가볍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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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 해 추석에 개봉한 '조폭 마누라'가 평론가나 언론의 혹평을 받으면서도 개봉 1주일 만에 전국에서 1백50만명 이상을 끌어모으는 예상 밖의 실적을 올리자 많은 이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평론가들은 "이 영화는 '웃기면 그만' 이라는 막가파식 코미디"(심영섭씨)라거나 "이런 영화가 대세가 될 때 우리 사회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위상이 바뀌지 않을까 걱정된다"(김영진씨)고 했다. 한 제작자는 "영화적으로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작품에 관객이 몰린다면 제작자들은 앞으로 관객의 눈높이와 취향을 어디다 두고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이런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조폭 마누라'는 전국에서 5백20만명을 불러모았다. 지난해엔 코미디 영화가 특히 강세를 보여 '엽기적인 그녀'(4백90만명) '신라의 달밤'(4백40만명) '달마야 놀자'(4백만명) '킬러들의 수다'(2백20만명) 등이 차례로 흥행 상위권을 형성했다.

올 들어서도 최근 '정글 쥬스'가 평단과 언론의 비우호적인 대접에도 불구하고 흥행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고, 오는 12일 개봉하는 패러디 영화 '재밌는 영화'에 대해서도 벌써 많은 관객들이 관심을 쏟고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가히 '코미디의 전성 시대'라 할 만하다. 충무로에선 어떤 장르의 영화를 하더라도 '코미디 코드'가 있어야 한다는 게 불문율처럼 굳어진 상태다. 코미디 영화의 귀재 찰리 채플린은 "웃음과 눈물은 꽤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했다. 시대가 변하고 정서가 변덕을 부려도 코미디는 보는 이의 영혼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힘이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조폭 마누라'예상 외 대박

그러나 최근 한국의 코미디 영화들 태반은 채플린의 정신과는 멀어보인다. '투캅스''공공의 적'의 강우석 감독도 "요즘 코미디는 관객으로부터 웃음을 구걸하려 한다"고 비판했지만 좋게 말해 가볍고 유쾌한 영화, 나쁘게 말하면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영화가 주류인 건 분명하다. 어찌됐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기 이전에 근래 한국의 코미디 영화가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은 관객의 취향이 변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의 주 관객인 젊은층은 탈정치의 상품소비 시대를 사는 세대답게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정서적 틀을 갖고 있다. 얼마 전 『영화 속의 철학』을 펴낸 박병철 교수(부산외국어대)는 "근래 젊은이들은 배우자의 요건에도 '웃길 줄 알아야한다'는 조건을 달 정도로 웃음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며 " 그러나 이들이 요구하는 웃음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 담긴 진정한 의미의 유머가 아니라 TV 토크쇼 등에서 보듯이 가벼운 것 일색"이라고 말했다.

말초적·자극적 웃음 대부분

60년대에 김희갑이나 서영춘·구봉서·황해·배삼룡씨 등이 펼쳤던 슬랩 스틱 코미디, 즉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시절엔 코미디가 영화의 주류는 아니었다. 사회 자체가 무거웠던 그 시절 코미디언들은 진짜 '웃기는 사람' 취급을 받았고 코미디는 영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윤활유나 양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권위가 사라지고 사회 자체가 가벼워졌기 때문인지 코미디가 주류가 되고 코미디언도 별스럽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바보스럽고 모자라는 느낌을 주는 슬랩스틱 코미디보다는 개그, 즉 말장난에 의존하는 코미디가 늘었다.

장르 불문 코미디 요소 첨가

이처럼 가벼움 일색이다 보니 이전엔 중후한 쪽으로 분류되던 장르에도 코미디의 비중이 높아져 코믹액션·코믹멜로·코믹공포 식으로 장르의 혼성화 현상이 일반화하고 있다. '조폭 마누라'나 '달마야 놀자''신라의 달밤' 등 지난해에 히트한 영화들은 조직 폭력배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액션과 코미디를 조화시킨 예다.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은 한 가족이 살인 사건에 말려드는 상황을 그린 공포 영화지만 곳곳에 코미디의 요소를 배치한 특이한 작품으로, 뒤이어 오는 코믹 공포 장르에 힌트를 주었다. 최근작 '복수는 나의 것'도 하드 보일드에 코미디를 결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요즘 코미디 영화의 또 다른 특성은 만화적인 상상력에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는 점이다. 코미디 영화가 만화에 손을 내민다는 건 영화가 과장된 캐릭터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얘기다.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젊은 친구들은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주유소를 턴다.

사건이 발생하는 이유나 인과관계가 분명치 않은 이 영화에 1백만명 이상의 관객이 호응한 것은 영화의 스토리보다는 영화 속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 때문이다. '무대포'나 '딴따라' 등으로 불리는 주인공들은 현실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은 온갖 행동을 천연덕스럽게 해대는 것이다.

강렬한 캐릭터로 웃음 유발

가위를 분해해 위협적인 칼로 사용하는 '조폭 마누라'속 신은경의 캐릭터나 남자 친구를 휘어잡는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이 맡은 역도 만화적으로 인물의 성격을 극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한국 영화를 패러디한 '재밌는 영화'의 여주인공은 '쉬리'의 이방희(김윤진)와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의 캐릭터를 합친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자 김미희씨는 "한국 영화를 패러디하는 게 가능했던 것은 최근 코미디 영화들의 캐릭터가 강렬해 어디에 갖다 놓아도 부각되어 '아, 저 장면은 어느 영화의 누구의 행동에서 딴 것'이라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라며 "이들의 성격을 모아가다 보니 다시 색다른 캐릭터가 탄생하더라"고 설명했다.

사실 90년대 초반의 히트작인 '결혼 이야기'나 '투캅스' 등은 캐릭터보다 상황과 컨셉트를 강조한 영화였다.

새로운 코미디 영화의 전형을 세웠다고 할 수 있는 '결혼 이야기'(92년)는 로맨틱 코미디로서 장르간 퓨전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주연이었던 심혜진·최민수가 맡은 캐릭터가 상황을 압도한 작품은 아니었다. 대신 당시 급증한 맞벌이 부부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사회적 현실의 직접적인 반영이라는 측면이 도드라졌다.

'투캅스'도 고지식한 신참 형사와 능글맞은 고참 형사를 대립시켰지만 역시 '경찰로 상징되는 정치 권력이 썩었다'는 컨셉트가 캐릭터를 누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액션 코미디는 이같은 풍자성이 휘발된 경우가 많다.

'결혼 이야기'와 '엽기적인 그녀'의 제작자 신철씨는 "웃음이라는 것은 지역성과 부족성이 강하기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해 한국 영화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장르"라며 "유사한 이야기로 맴돌면 결국엔 제살 깎아먹는 꼴이 되겠지만 좀 더 수준높은 코미디를 계속 고민한다면 장래가 밝다"고 낙관했다.

이영기 기자

<시리즈 글 실린 순서>

1.영화계 슈퍼파워 강우석 그룹(1/1)

2.마이더스의 손-영화 프로듀서(1/16)

3.무대 뒤 주역-뮤지컬 프로듀서(1/23)

4.대중음악산업(1)-대형기획사(1/30)

5.대중음악산업(2)-중견기획사(2/6)

6.대중음악산업(3)-독립기획사(2/20)

7.창작 열풍-에니메이션 제작자들(2/26)

8.'환상의 날개'활짝-팬터지만화(3/6)

9.미래 창창한 국내 팬터지 영화(3/13)

10.'백가쟁명'-국내 팬터지 소설(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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