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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4> 제101화 우리 서로 섬기며 살자 ③ '아세아방송' 개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1970년대 초 제주에 아세아 방송을 세우면서 정관계로부터 받은 혜택은 요즘이라면 틀림없이 청문회감이다. 부지 구입을 위해 답사를 할 때는 당시 공군참모총장이던 옥만호 장군이 많은 도움을 줬다.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려면 비행기가 필요한데 선뜻 8인승 항공기를 내주었다.

훗날 옥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개인의 일이 아니라 미국 자본을 끌어들여 우리나라에 방송국을 세우는 국가적인 사업이어서 적극 협조하기로 결정했지요." 옥장군과는 그가 1962년 수원 10전투비행단장으로 부임할 때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방송국을 짓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나에게 윤치영 의장이 소개해 준 새문안교회 김익준 장로도 잊을 수 없다. 7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장로는 매우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방송국 설립과 관련하여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할때면 그는 어디든지 나를 동행했다. 그럴 때면 그는 관할 부서로 들어가 비서를 제치고 책임자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여기 도장 하나 찍어 주시오." 비서가 사색이 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방안에 있던 책임자도 놀라서 일어섰다. 관계자들을 만나면 김의원과 나는 중국과 러시아, 북한에 복음을 전파하려면 방송이 꼭 필요하다고 설명하며 허가를 받아냈다. 만약 신중하게 사전에 연락하고 그곳에서 답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면 방송사 허가는 절대로 받아낼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여곡절 끝에 방송국 설립허가가 나고 제주도에 건물을 올렸다. 미국 본사의 명칭인 Far East Broadcasting Company(FEBC)를 본떠 제주극동방송이라는 이름을 걸고 싶었으나 이미 미국 팀미션(선교회)이 1956년에 세운 극동방송이 방송을 하고 있어 아세아방송이라는 이름을 택했다.

건물까지 마련했지만 관세부담이 커 장비를 1972년 8월 부산항으로 들여오고도 계속 묵히고 있었으니 우리는 다시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관세도 문제였지만 하루에 몇십만원씩 드는 창고비가 더 문제였다. 그때 마침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서거하여 김종필 총리가 조문사절로 가게되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나는 도쿄로 가서 미국 FEBC 본사의 로버트 보우먼 총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서 전화를 걸다가 비밀이 새나가면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한국의 국무총리가 미국에 가니 워싱턴 정치인들을 통해 면세를 부탁해주세요."

보우먼 총재는 미국에 온 김총리를 주빈으로 가든파티를 열며 방송사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김총리가 귀국한 후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려 했으나 장비를 면세로 통과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었다.

궁리 끝에 찾아간 곳이 통일원이었다. 대공방송을 위한 방송장비이니 우리가 통일원에 장비를 기증하고 통일원에서 우리가 대여받는 편법을 썼다. 그리고 나는 20년 동안 장비를 대여받기로 하고 도장을 찍었다.

후일 감사 때면 이 문제가 자꾸 불거져나왔다. 서류상에는 통일원에 방송사가 하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방송을 안하고 지출되는 예산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애초에 친구 윌킨슨이 방송국을 설립할 때까지만 도울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만 방송국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윌킨슨이 1971년 8월 26일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복음 전파에 정열을 쏟던 윌킨슨이 겨우 서른 중반의 나이에 타계하자 나는 큰 충격과 함께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아세아방송의 서울 사무소는 무교동에서 시작했으나 곧바로 한양대 김연준 이사장이 태평로 대한일보 빌딩 3층을 내주어 그곳을 사용했다. 방송사를 돕는 손길도 많아지고 아는 사람도 점점 늘어났다. 마침내 1973년 6월 30일에 개국을 결정하자 미국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빌리 김이 아니었다면 방송국 설립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세아 방송 사장으로 일해주십시오."

나는 망설였지만 대안이 없었다. 개국을 앞두고 한창 바쁘게 뛰고 있을 때 나의 인생의 물줄기를 확 바꿔놓을 또 다른 일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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