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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경선- 절반의 성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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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새로운 정치실험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당의 이른바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제'는 일단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3월 9일 제주에서 시작해 울산·광주·대전·강원 지역 경선을 거치는 동안 민주당은 국민적 이목을 끌었고, 노무현 후보 돌풍을 일으킴으로써 재집권의 가능성을 되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후보경선 과정은 권위주의와 1인 보스정치, 밀실정치에 염증을 느껴온 국민들에게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최종 평가는 서울 대회(4월 27일)까지 유보해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절반의 성공에 대한 기대감과 절반의 실패에 대한 아쉬움을 동시에 느낀다.

민주당에 절반의 성공을 안겨 준 첫째 요인은 역설적이지만 여권 핵심부의 붕괴와 이에 따른 분권화다. 온갖 게이트로 권위주의적 보스정치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민주주의의 보편적 원리가 작동되면서 오히려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난 것이다.

둘째,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과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이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정보화·네트워크화하고 있는데,산업사회의 가치관과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권의 낡고 두꺼운 껍질이 깨어질 수 있다는 기대가 새로운 정치실험에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경선 과정과 '노무현 돌풍'을 '시민사회 성숙'이나 '개혁 열망의 발현'등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현실의 이면을 적시하지 못한, 지나치게 희망적인 분석인 것 같다. 그것은 절반의 실패를 가져온 요인들을 살펴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첫째,'국민경선'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민주당 대의원과 일반 당원들의 투표다. 그런데 문제는 선거인단의 기권율이 지역별로 20~30%에 이른다는 점이다.'일반 유권자 선거인단'만 따로 보면 그 비율은 훨씬 더 높아진다. 이것은 각 후보 진영이 일반 유권자 선거인들을 무더기로 모집해 신청했기 때문에,1백대 1의 경쟁을 거쳐 선정되고도 정작 투표에는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다. 결국 국민참여 경선이 조직동원 싸움의 연장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국민경선의 참 뜻은 그 과정을 통해 각 후보들의 비전과 정책을 드러내고 국민적 평가를 받아보자는 데 있다. 그런데 경선이 중반에 접어든 지금까지 각 후보의 정책이나 식견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싸움만 무성하다. 각 진영의 주된 주장을 보면 대세론, 대안론, 영남후보론 등으로 어디에도 비전이나 정책은 없다. 심지어는 색깔론,자질론,여성스캔들,학력위조 등 인신공격성의 구시대적 정치행태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셋째, 비전과 정책대결 대신 세몰이 식의 조직싸움이 되다 보니 당내 경선에서조차 지역주의의 망령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대전 경선에서는 이인제 후보가 67.5%의 몰표를 얻었고, 울산 경선에서는 노무현·김중권 후보가 60%를 얻었으며, 노무현 후보는 부산·경남에서 더 큰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나마 광주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표가 쏠린 것은 '분식(粉飾)지역주의'라는 의혹과 '김심' 및 '음모론'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각 후보가 자기 연고지에서 많은 표를 받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문제는 이들이 모두 정책경쟁 대신 지역주의를 득표의 주요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선에서 드러난 절반의 실패는 후보들의 사퇴 도미노를 초래했다.7명의 후보가 3명으로 줄어드는 과정에서 금품살포,배후세력 음모론, 지역주의 부활 등이 터져나왔다. 더욱이 대세론을 주장해온 이인제 후보마저 사퇴 여부를 심각히 고려한다니, 모처럼 국민적 기대를 불러일으킨 새로운 정치실험이 빛 바랜 행사로 끝날까 우려된다. 이제 여야를 초월해 민주당 '국민경선'의 성공과 실패 요인들을 차분히 분석해 봄으로써 정치발전의 새 방향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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