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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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판소리 '흥보가'는 일명 '박타령'이라고도 부른다. 흥부가 박을 타면서 부르는 타령을 제목으로 딴 것이다. 가을이 깊어갈 때면 초가지붕에서 함께 영글어가는 박은 그만큼 우리와 친숙했는데,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박에 대한 기록은 신라의 시조 혁거세의 출생에서 시작한다. 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박(瓠)과 같아 박(朴)으로 성을 삼았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표주박 호(瓠)'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박을 재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박은 플라스틱 그릇이 생산되기 전에는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물을 떠먹는 바가지에서 똥을 푸는 똥바가지까지. 거지에게는 바가지가 바로 밥그릇이기도 했다. 또 호박죽에서부터 된장찌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식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늙은 호박을 꿀에 재서 먹으면 산후조리에 좋다고 한다. 호박떡과 호박범벅 등의 재료도 역시 늙은 호박이다. "도깨비도 호박범벅을 좋아한다"고 알려질 정도로 우리 민족은 호박을 좋아했다.

호박의 상징적 의미도 흥미롭다. 집안에 시집 갈 처녀가 있으면,'애박'이라는 조그만 표주박의 씨를 담 쪽에 심어둔다. 그것이 자라 담을 타면 동네 총각들은 처녀가 시집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표주박은 초례를 치를 때 신랑과 신부가 교환하는 술잔으로 쓰인다. 신랑과 신부가 한몸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징표인 셈이다. 초례가 끝난 후에도 방안에 매달아 두어 부부의 애정을 확인하는 데 쓰인다.

신부가 시댁에 처음 올 때 문 앞에 피워놓은 모닥불을 넘어가게 해서 부정을 물리치곤 했었다. 동시에 문 앞에서 바가지를 깨뜨리는 풍속이 있는데, 주로 시어머니가 그 일을 맡는다. 바가지 깨지는 소리가 신부의 몸에 붙어 들어오는 잡귀를 놀라게 해서 물리친다는 주술적 장치다.

반면 장례에서 관이 방을 나올 때 바가지를 깨는 풍속도 있다. 여기서 바가지는 죽은 사람의 그릇을 상징한다. 즉 그릇을 깨뜨렸으니 이승에서의 관심을 모두 끊고 저승으로 잘 떠나가라는 의미다.

진도에서는 귀신이나 도깨비를 만나면 바가지를 뒤집어놓고 칼로 긁어 소리를 낸다. 이 소리를 귀신이 제일 두려워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염병이 돌 때 긴 장대에 바가지를 걸어두면 귀신이 침범하지 못한다고도 한다. 바가지가 벽사(?邪·악을 물리침)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호박은 여자를 상징하기도 한다.'호박이 맨 처음 열렸을 때 남자가 따면 더 많이 열린다'는 속설은 그런 성적인 관계를 의미한다.'호박씨 깐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끝>

김종대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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