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에세이'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1면

사람됨이 점잖지 못해서인지 기자는 근엄한 논문 형식의 글들에 편견을 갖고 있다. 제대로 읽고 인용을 했는지, 꼭 인용할 필요가 있었는지부터 한두번 따져보는 것이다. 각주(脚註)가 주렁주렁한 글일수록, 즉 바다 건너 저 편 서구의 정전(正典)이 갖는 권위를 - 막상 그 권위란 68혁명 이후 본토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 등에 업으려는 논문 상당수가 신통치 않다는 심증도 그 때문이다. 글을 서술하는 자기를 '나는~'하는 식으로 노출하지 않는 글, 객관성이란 언덕 아래 은폐·엄폐하려는 글이 이른바 논문 형식의 글쓰기다. 따라서 스타일도 없고, 자신의 시각은 증발해버린다.

반면 이번 주 프런트면에 올린 이영미의 책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는 뛰어난 저술인데, 필요한 곳에는 '나는~'이라는 서술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각주? 단 한 곳도 없지만, 이 책이 자의적(恣意的)이라는 증거는 없다. 본디 우리 말은 주어 노출이 필요 없지만, 때론 의도를 명쾌하게 하기 위해 '나는~'이란 표현은 요긴하다. 기자의 이런 판단은 철학교수 김영민의 영향일 것이다. 『손가락에서 손가락으로-글쓰기와 철학』(민음사, 1998)등을 펴낸 그는 기왕의 논문형식의 글을 '기지촌(基地村) 지식인들의 매판적 글쓰기' 라고 몰아붙인 바 있다.

그 지적이 벌써 10년 전 얘기인데, 논문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건 사회적 현상이다. '교수신문'이 국내의 교수들을 대상으로 '학술 에세이 공모'를 갖는 것도 그걸 실감케 한다. 바로 이런 공간을 통해 향후 학술 에세이의 새 모델이 정립될 것이다. 근대 이전 최한기의 『추측록(推測錄)』, 박지원의 『호질(虎叱)』같은 다양한 스타일의 글들 말이다. 세상은 이토록 바뀌고 있는데 따로 노는 곳이 딱 한군데 있다. 희한하게도 대학이 그렇다. 이를테면 대학별 내규는 조금씩 다르지만, 문학이나 사회학 분야 계간지에 실린 글들에 대한 평점이 지나치게 낮다.

불문학 등 전국 규모 학회지(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한 편을 1점으로 평가한다면, 계간지 등에 발표한 글은 0.1점에서 0.3점 정도를 매기는 게 통례인데, 이게 영 웃기는 일이다. 학술 연구는 그 자체로 엄정한 심사와 평가가 있어야겠지만, 사회와의 소통을 중시하는 인문사회과학 에세이가 실제의 효용가치와 별도로 지나치게 폄하되는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그건 우리 인문학의 편협한 아카데미즘 탓이다. 하지만 교수들 자신이 잘 안다. 일부 미세 정보나 자료(외국 논문 등)들을 짜깁기하는 학술논문이 때론 제대로 된 학술 에세이보다 '제조'하기가 영 쉽다는 점을.

번역의 경우도 그렇다. 대학별 내규에서 번역작업은 때로는 0점으로까지 처리되는데, 바로 이 때문에 세상이 다 아는 번역 홀대가 고쳐지지 않고 있다. 학술서 번역의 경우 1년 이상이 소요될 수도 있는데 그에 대한 대학의 평가가 0점이거나 0점에 가까우니 연구자들의 번역 의욕은 없는 것이다. 결국 연구자의 싱싱한 호흡이 살아있는 글쓰기와 제대로 된 번역을 가로막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가히 심각하다. 세상 변화에 걸맞은, 편협함을 넘어선 싱싱한 아카데미즘, 그것이 과제인데….

출판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