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式 리더십의 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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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나라당 쪽에 서있는 관객들은 지루하다. 민주당 쪽에선 국민경선제로 흥행 대박을 터뜨리며 정치 묘미를 맛보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회창 대세론은 피로 증세를 보인다. 연출 겸 주연인 李총재가 내놓는 상품들이 시원치 않은 탓이다.

李총재의 선택이 흔쾌했던 적은 별로 없다. 대개 머뭇거리고 찜찜하다. 이번의 총재권한대행 카드도 비슷하다. 李총재의 주류는 당내 민주화와 대선 전략을 고려한 절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러 단계·조건이 붙어 있어 제왕적 총재 논란은 여전하다. 비주류 김덕룡·홍사덕·이부영 의원의 반발을 들지 않더라도 수습안은 설명이 복잡해지면 효과가 반감된다. 결단에서 오는 '감동의 정치'는 이끌 수 없다.

우리 정치문화에서 확실한 대선 후보가 있으면 총재직을 넘겨도, 집단지도 체제를 해도 당의 역학구도는 후보 중심으로 짜여진다. 李총재 쪽에 열심히 줄서기를 하게 마련이다. 때문에 총재를 그만두면 당 장악력에 탈이 생길 것이라는 판단은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이나, 턱없는 의심에 따른 고집으로 비춰진다.

법적 사고로 굳어진 李총재한테 세련된 정치적 감수성을 바라는 관객 요구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위기를 기회로 삼는 극적 반전(反轉)은 여론 흐름만 알면 할 수 있는데도 그걸 왜 못하는지 안타깝다는 게 관객들의 실망감이다. 그 속에는 '이회창식 리더십'에 달려 있는 포용력 부족 문제가 사라지지 않느냐는 의문이 있다.

李총재가 다듬어온 법치(法治)나 국민 우선 정치도 상처나 있다. 가족 빌라 파문에 대해 그는 '가슴 깊이 반성, 사려 깊지 못한 처신'이라고 사과했다. 그러나 민심의 시선은 빌라의 진짜 주인, 사돈들 재산, 아들과 딸 부부의 생활 등 구체적인 부분으로 옮겨져 있다. 따라서 이런 의문 섞인 궁금증에 대한 해명 없이 강도 높은 사과나 '가족 근신'다짐만으론 민심을 다독거리기 힘들다.

이런 장면들을 보는 한나라당 쪽 관객들의 탄식에는 "왜 李총재는 변하지 않는가"라는 불만이 드러난다. 5년 전 아들 병역파문 때 '법적으론 문제 없다'는 자세 탓에 그렇게 혼났으면서도 빌라 파문의 초기대응 때 유사한 모습을 보인 데 대해 답답해하는 것이다. 서민·중산층이 열불나는 일만 골라 터지는 데 국민 우선 구호가 먹힐 수 없다. 그의 비전인 법과 원칙이 부패 척결과 서민 보호 이미지를 힘 있게 만들지 못하는 이유다.

대세론이 흠집이 나는데도 주류측은 믿는 구석이 있다. DJ실정(失政)에 따른 정권교체 열망이 이런 논란을 잠재울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한나라당 쪽 관객들을 왜소하게 만들기 쉽다. 관객들은 정치 변화 이슈를 선점해버린 반대편과의 기세싸움 때 정권교체만으로 맞설 수 있느냐는 고민을 하는 것이다.

민주당 노무현 고문의 약진은 보수층이 대부분인 이들 관객을 긴장시키고 있다. "우리 정치가 혁신과 보수로 구별돼간다"는 JP의 지적이 이들의 가슴에 와닿는다. 때문에 노풍(盧風)에 담긴 진보적 이념, 역사관, 정책들과 비교할 때 李총재의 리더십과 비전이 경쟁력이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李총재의 이 부분에 대한 관객 평점은 높지 않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때가 최근 사례다. 주민들이 굶주리는데도 무기에 의존하는 북한의 본질적 문제점은 제대로 제기하지 못한 채 이 표현을 지지했느니, 안했느니 하는 공방에 머무른 데 대해 관객들은 마땅찮아했다. 역사 논쟁의 한복판에 있는 '박정희 평가'에 대한 李총재의 입장은 명쾌하지 않다.

李총재는 "사슴을 잡으려면 토끼에게 눈을 돌려선 안된다"는 말로 정권교체 의지를 다지고 있다. 그렇지만 당내 민주화, 비주류 포용, 역사관 정리, 측근정치 청산 등 토끼로 여겨지는 것부터 잡을 능력이 있는지를 먼저 보여달라는 한나라당 쪽 관객들의 요구는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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