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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명동 국립극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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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그리움과 함께 저편 먼 기억을 하나 들춰내야겠다. 지금은 없어져버린 옛 명동 국립극장.

그곳은 내 어릴 적 놀이터이자 연극배우로의 꿈을 키워가던 궁전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나는 국립극단 아역 배우로 명동 국립극장 무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국립극장으로 달려가 연극 연습과 공연을 거듭했다.

변기종 선생의 무대 50주년 기념공연 '고독은 외롭지 않은 것'을 시작으로 차범석 선생의 대표적인 희곡 '산불', 이해랑 연출의 '북간도', 허규 연출의 '안티고네' 등 수십편의 연극에 출연하면서 나이답지 않게 연극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다. 연습이나 공연이 없는 날도 다른 공연을 보기 위해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국립극장을 들락거렸다.

명동 국립극장은 공연이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홍보를 위해 현수막을 내걸고 쇼윈도에 출연 배우들의 사진을 붙여놓곤 했다. 아역이지만 내 사진도 가끔 내걸렸다. 덕택에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연극을 한다니까 극장 근처 제과점이나 식당에서 신기해 하며 공짜로 음식을 주기도 했다. 지금은 쇼핑몰이 되어버린 명동공원 옆에 있던 허름한 수제비 집, 유네스코회관 옆골목에 있던 돈가스집, 또 어머니 손을 잡고 드나들던 한일관 등 국립극장과 더불어 그 맛이 그리워지는 곳들이다.

지금은 유명인사가 된 많은 이들이 당시에는 젊고 패기 넘치는 배우였고 연극에 대한 열정과 의욕만으로 가난을 참아가며 연극에 몰두했었다.

가끔은 제작비가 모자라 집에서 잡힐 만한 것을 들고 나와 전당포로 가던 모습들도 생각난다.

또 많은 어른들의 따뜻한 보살핌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어른들 속에 섞여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을 하던 나를 기특해 하며 좋은 연기자가 되기 위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라는 말과 함께. 그 분들의 열정을 지켜보며 연극을 배우고 인생을 배우지 않았을까.

어린 나이에 연극을 제대로 알고나 했는지 자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 절실한 것이 꿈틀거렸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영화일을 하고 있지만 어쩌면 연극배우로 살고 싶은 꿈을 가슴 한켠에 그대로 간직하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옛날 국립극장 무대를 그리워하며….

채윤희

<영화인·올댓시네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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