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女전사 홍라녀의 사랑과 야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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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인삼꽃으로 물들인 붉은 치마를 입고 신기(神技)의 무술로 거란·말갈족을 거꾸러 뜨렸다는 홍라녀(紅羅女). 발해의 전설 속 여전사다.

꽃같은 입술에 하얀 이를 드러내는 미인도 속의 인물 같았다는 16세의 홍라녀는 황룡대도를 휘두르며 전장을 누볐다.

'세명만 모이면 호랑이도 때려 잡는다'는 발해인의 기개까지 맞물려 홍라녀의 전설은 민족주의 색채가 뚜렷한 서사시로 변했다.

홍라녀의 검술은 무(舞)와 같았고 그를 만난 적들의 얼굴은 흙빛이 됐다.

그러나 수백명의 말갈 군사를 단칼에 베어내던 홍라녀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그의 위패 앞에서 돌처럼 굳어 져 숨을 거둔다. 애국을 외치는 '잔다르크형'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 냄새가 나는 것은 이 부분 때문이다.

강호를 갈망하며 도적 호와 사랑을 나누던 영화 '와호장룡' 속 여걸 용(장쯔이 분)과 닮았다. 애국과 강호 최고수를 향한 피는 끓지만 사랑 또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예역사소설이란 타이틀보다는 사랑·권력을 향한 욕망을 그린 드라마라 하는 게 나을 듯싶다.

『나는 조선의 국모다』(태동출판사) 등 역사소설을 썼던 작가 이수광은 1994년부터 발해 관련 자료를 수집해 13가지 유형의 홍라녀 전설을 얻었다고 한다. 용왕의 딸, 발해 황제의 동생이라는 갖가지 설정 가운데 발해 제 3대왕 문왕(대흠무)의 딸이라는 구체적인 거명에 눈길이 갔다.

실제로 대흠무는 56년간 재위했으나 그 뒤를 이은 대원의는 성격이 포악해 2~3개월 후 폐위됐다는 것. 여기에 대흠무의 후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이 일어났을 것 같다는 작가의 추리가 보태졌다.

홍라녀가 정쟁의 희생물로 스러진 것으로 이야기를 얽어가다 보니 영웅 전설은 시대·공간을 뛰어넘는 인간사로 살아나게 됐다.

소설 속 홍라녀(대소희)는 자객에게 어머니와 형제를 잃고 장백산(백두산)의 장백성모에게 10년간 길러진 소녀. 황제의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은 알게 됐지만 이미 가난한 어부의 아들 이언과 사랑하는 사이다. 그는 전장으로 전출된 이언을 쫓아 거란과 싸우고 말갈을 패퇴시킨다.

그러나 권력을 노리는 황족 대원의·대영사의 간계에 이언이 독살되고 대흠무도 황궁에 감금돼 죽어간다. 대소희는 이언의 복수를 하고 격문을 내걸어 모반까지 평정하고 생을 마친다.

홍수현 기자

NOTE

작가는 홍라녀와 이언의 사랑도 '홍라녀 은도바특리(은도라는 지역의 관리라는 뜻으로 이언의 직함)'라는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여성이 주체가 되어 지고지순한 사랑을 펼치는 장면에서 발해의 발랄한 시대 분위기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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