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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3> 제100화 '환란주범'은 누구인가 (17) '종합대책'의 성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1997년 11월 17일,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날 저녁 있었던 캉드쉬 IMF총재와의 비밀회담 결과를 보고할 때까지만 해도 'IMF행'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IMF행'은 발표만 남겨놓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로선 IMF행,즉 IMF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기로 했다는 사실만 덜렁 발표할 수는 없었다.

IMF구제금융이 당시 우리나라가 겪고 있던 외환위기에 중요한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구제금융으로 한국경제가 겪고 있던 위기를 다 해결할 수는 없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IMF가 인정했듯이, 당시 우리 거시경제여건(펀더멘털)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위기의 실체는, 국제금융계가 이를 인정하면서도 크레디트 라인(신용한도)을 줄이고 롤오버를 거부하며 투자금을 빼나가는 것이었다.

국제 금융계에선 한국의 금융시스템을 불신하고 있었다. 단기 외채를 끌어다가 수익성 없는 곳에 장기 투자하면서 생긴 막대한 부실채권이 문제였고,금융기관들은 엄청난 부실채권을 안고도 쓰러질 줄 몰랐다. 게다가 부실채권의 규모를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 외국의 시각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문제가 무엇인지 한국정부가 알고 있는지,해결할 의지가 있는지,추진할 능력이 있는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외국 투자자들의 깊은 불신이었다.

그것은 바로 '신뢰의 위기(Credibility Crisis)'였다. 때문에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지 않고선 근본적인 위기 극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 위기에 대한 우리의 진단이었다.

부실채권 정리와 구조조정 등을 통해 기업·금융시스템을 과감하게 고쳐야 한다는 점을 한국 정부가 알고 있고, 한국 정부가 이를 추진할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국내외에 보여줘야 했다. 금융산업 구조조정은 더 이상 늦출 수 없게 됐고, 구조조정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금융개혁 관련법안 제정은 필수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국제사회는,한국 정부의 문제 해결 의지와 능력에 대한 가장 좋은 '징표'로서 금융개혁관련법 제정 여부를 주시하고 있었다.

금융개혁관련법 처리와 금융산업 구조조정이 한국 경제에 대한 불신을 씻어주는 것이라면,IMF 자금지원은 그 무렵 겪고 있던 유동성 위기를 해결하는 동시에 금융구조조정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어려움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금융개혁관련법·금융산업구조조정·IMF자금지원, 이 세가지를 패키지로 묶은 종합대책을 구상했고, 강경식 부총리가 11월 9일 제안한 소위 '그랜드 디자인'이 이 구상의 출발이었다.

IMF도 이같은 우리 구상을 높이 평가했고,이는 캉드쉬 총재와의 회담을 성공적으로 만든 큰 요인이었다.

따라서 캉드쉬 총재에게서 IMF지원 약속을 받은 그 무렵, 정부는 금융산업 구조조정안을 한층 구체화하면서 한편으론 금융개혁관련법의 국회 통과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IMF행 발표는 금융개혁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금융산업 구조조정안과 함께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와 관련해, 뒷날 필자와 姜부총리에게 왜 강력한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미리미리 시행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정책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이런 비판에 대해 구구하게 변명을 할 생각은 없다.

IMF관리체제를 겪고나서 종금·증권은 물론 은행도 부실판정을 받으면 퇴출당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그 비판은 옳다.

하지만 대통령의 권력누수가 본격화하는 정권말기에 추진하기엔 적절치 않다는 지적을 무릅쓰고,姜부총리와 내가 재임기간 내내 금융개혁관련법 마련에 매달렸던 이유도 바로 금융시스템을 수술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금융개혁관련법은 막바지 단계에서 국회 통과여부가 불투명해져가고 있었다.

우리로선 사력을 다했지만, 금융노조 등 이해집단의 반발과 대선을 앞두고 모든 것을 득표와 연결지어 법안처리에 미온적인 정치권의 행태를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금융권 수술의 필요성은 절실했지만, 금융개혁관련법 제정을 통해 감독제도, 예금보험제도, 부실채권정리기금 등 필요한 제도적 기반을 정비하지 않고 금융시스템을 수술하다간 엄청난 혼란만 초래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해 정기국회는 대통령선거 때문에 여느해보다 일찍 폐회하기로 돼있었다.

폐회일은 11월 18일이었다.

정리=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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