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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교만해진 한국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중국 최남단에 있는 휴양지 하이난(海南)섬이 한국인들로 법석이다. 섬 전체에 깔린 11개 골프장의 태반이 한국 골퍼를 상대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골프장마다 캐디들에게 한국어 습득 훈련을 시킨 덕에 간단한 회화도 가능하다. 일본인 골퍼들이 뜸해지고 빈자리가 한국인들로 채워진 데 따른 영업전략의 일환이다.

해외에서 한·일 두 나라 레저인구의 이같은 교체현상은 태국이나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에서도 마찬가지다. 거창하게 '국력의 변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골프장에 따라서는 한국인들이 전체 내장객의 70~80%를 차지하는 경우도 많다. 국내 평가가 어떻든 한국 경제가 아시아에서 손꼽힐 정도로 괜찮은 성장을 하고 있는 데 비해 일본 경제는 죽을 쑤고 있는 탓이라고 한다. 일본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국가신용등급이 위협받을 때마다 위기론이 증폭된다. 저러다가 일본이 가라앉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이제야말로 한국이 앞서갈 것이라고 자만하는 이들도 있다.

아시아 주요 골프장에서 한국인들이 큰 소리로 떠들거나 제멋대로 룰을 만들어 플레이하는가 하면 캐디 피를 듬뿍 얹어주며 으스대는 졸부 근성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는 것도 못마땅한 일이지만, 더더욱 눈감고 있을 수 없는 일은 일본에 대한 실속없는 우월론의 확산이다. 그런 정황이 몇몇 정치인에게까지 옮겨가고 있다. 4년 전 외환위기 때 우리가 일본에 매달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일본 위기론은 사정이 다급할 때 나타나는 체질적인 현상이라 해야 적절하다. 경제가 내리막길에 들어섰던 지난 10여년 동안 위기론이 대두되지 않았던 해가 없다. 매년 위기론으로 새해가 시작되고 또 위기론으로 그 해가 저물었다. 한국인은 조금 힘든 일이 있을 때 입버릇처럼 말하는 "나 죽겠다"는 표현을 "위기를 맞았다"고 해석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일본인이 말하는 위기론을 침몰 직전의 선박으로 쉽게 상상해 버리는 것처럼 경솔한 일은 없다. 우리는 대일(對日) 콤플렉스의 반작용으로 자칫 부정적 시각에 젖어버리기 쉽다.

일본 위기설을 부채질하는 장본인은 일본 미디어다. 비관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부각하기 때문에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앞선다. 정치가들의 리더십 부재와 부정부패·국회해산설 등으로 혼미스럽고 금융분야의 부실채권은 엄청나며 경상수지 흑자 축소, 구조조정의 지진부진, 산업공동화 가속화, 교육붕괴, 의료파탄 등 '위기 항목'들이 매일 나열된다. 이게 혹시 한국의 실상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착각될 정도다.

미국이 경상수지 적자를 안고 간다고 해서 산업경쟁력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전문가는 없다. 일본에 대해서도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기업도산이 이어지고 있으나 제조업은 끄떡없다. 일본의 저력이다. 경제불안으로 외국자본이 빠져 나간다지만 변동환율제 아래서 통화위기가 일어날 소지는 거의 없다. 일본에서 정쟁이 없었던 경우가 있었던가. 본래 신망을 얻지 못하는 정치꾼들의 싸움판만을 보면 어김없이 오판하기 쉽다. 그래도 관료와 사회 시스템을 움직이는 일본의 전문가 집단과 시민의식 등을 보고 위기 여부를 진단해야 한다.

일본은 지금까지 한국의 부정적인 측면을 벤치마킹함으로써 반면교사로 삼았다. 부가세와 대학입시제도·실명제·소선거구제 등의 부작용에서 교훈을 얻었다. 이제는 일본이 한국의 정보서비스 기술과 마케팅 등 긍정적 측면에서 공부해야 할 부문을 점검하고 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할 부문은 더 많다. 교만에 빠지면 일본의 장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겸손과 '역사의 덫'을 극복하는 슬기가 요청된다. 월드컵을 전후해 한·일 두나라가 경쟁하면서 서로 배우고 상대를 이해하는 문화코드가 우리 마음속에 깔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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