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적 분위기, 도발적 생각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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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배수아의 글은 묘한 마력을 내뿜는다. '몽환적 이야기'란 표현은 어쩌면 설명력이 없는 한낱 상투어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현실과 몽환을 경계 지우는 자는 누구인가, 도시 시스템의 톱니바퀴처럼 돌고 도는 삶에 현실이란 강력한 표지를 붙여준 자는 누구인가라고 배수아는 묻는다.

지난해 불쑥 독일로 떠난, 그것도 그 생애 최초로 해외에 나간 작가가 보내온 신작 소설 『이바나』는 그러므로 몽환적 응시 속에 삶의 리얼함이 숨어 있음을 그리고 있다. 이바나는 '이'바나, 혹은 이'바'나라고 어느 음절에 강세를 줘 읽어도 무방하다. 소설 속에서 이바나는 2만5천㎞를 뛴 낡고 예쁜 고물 자동차의 이름이며 그들이 여행한, 몰락해가는 도시 이름이기도 하다. 또 화자인 나와 K가 쓴 책의 제목이다. 이밖에도 소설 곳곳에서 '이바나'는 출몰한다.

소설은 외형상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직조돼 있다. 어느날 불면증에 시달리다 여행을 떠나게 된 K와 나의 이야기, 그리고 B와 간호사 산나의 이야기. 그러나 이 소설은 줄거리로 요약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물론 줄거리는 있다. 그러나 줄거리에 앞서는 것은 단연 문장과 문장을 촘촘하고 찐득찐득하게 만들어 주는 배수아의 도발적인 사유다.

그 사유는 여행과 일상에 대한 독특한 발언에서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작용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박물관과 이름난 장소에 호기심을 가지는 관광객이라기보다 단지 잠시 거주지를 옮기고 싶어하는 정적인 동물에 가까웠다"고 묘사된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혹은 안 할 자유라 지칭되는 일상 어법상의 여행은 "포화상태를 넘어버린 개성,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인 도시"가 사람들에게 내주는 당근일 뿐이다.

"우리들이 원한 것은 단지 잠과 침묵뿐이었다"는 생각의 주인공들이 책을 쓰려 할 때 편집자는 "그러니까 뭡니까. 결국 도시를 떠나 자연에서 살고 싶다, 자유로운 생활이 좋다, 뭐 그런 것 아닐까요?"라고 되받는다.

그러니까 몽환과 현실은 이런 식의 대화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가 바라는 삶(몽환)과 살아가야 하는 삶(현실) 중 어디에 근거해야 더 리얼한 삶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바나'란 단어를 하나의 의미로 붙박지 않고 이것 저것을 지칭하도록 꾸며 놓은 것은 작가가 던지는 대답일 것이다. 이 소설이 사람들 마음을 편치 않게 하는 것은 소설 읽기란 간접 여행을 통해 일상에서 잠깐 도피하고자 하는 자를 곳곳에서 찔러대기 때문이다. 그래도 좋다. 좋은 소설이란 모름지기 사유를 통해 존재의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을 주는 것 아닌가.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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