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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운문선원 나는 누구?… 참 自我 찾는 깨달음의'관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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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백암산 허공에 치솟은 절벽이 나그네를 압도한다. 바위 한 덩어리가 금세 굴러올 듯하다. 그런 산세 속에서도 낙락장송은 생사를 초월한 대장부처럼 의연하다. 허리가 꼿꼿한 젊은 수행승이 가파른 산길 끝에 있는 운문선원(雲門禪院)으로 가고 있다. 자신의 법명을 밝히지 않는 그는 올해로 운문선원에서 일곱 철을 나고 있는 중이란다. 큰절인 백양사에 내려왔다가 선방으로 되돌아가는 모양이다.

여기서 철이란 안거(安居)를 말하는데, 안거에는 겨울철의 참선 수행인 동안거와 여름철의 하안거가 있다.

안거를 마친 수행자들은 공부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만행을 떠나기도 하고, 혹은 남아서 타파하지 못한 화두를 붙들고 참선을 계속하기도 한다.

운문암(雲門庵) 운문선원은 고려 때 각진국사가 창건한 이후 호남 제일의 선방으로 선풍을 드날렸다.6·25전쟁으로 소실됐다가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인 서옹스님의 원력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 선원을 거쳐간 선사로는 서산·진묵·백파·학명·환응·용성 등과 가까이는 만암·인곡·고암·운봉·법전 같은 분이 있고 특히 운봉은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오늘날 운문선원에서는 서옹스님이 선서의 으뜸인 『벽암록』을 10년째 강의 중인 바, 수좌(首座)들이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자 서로 운문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이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수좌란 참선만 하는 스님을 일컫는 말이고, 방부란 안거를 부탁하는 일.

선방이란 부처가 깨달은 자리를 순수하게 지키고 닦는 수선장(修禪場)일 터이다. 일찍이 부처가 밝힌 진리의 등불을 꺼지지 않게 이어가는 전등의 도량인 것이다. 어느 철이건 운문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은 대략 20여 명 정도이다.

나그네가 운문선원에 도착한 시각은 점심공양 무렵. 그런데 나그네는 그들 자리에 끼어 들 수가 없다. 공양주 설명에 의하면 정해진 원칙대로 대중의 수만큼만 밥을 지었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말하는 공양주보살이지만 쌀을 꺼내는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숫자가 많든 적든 선방 스님들은 모두 소임을 맡는다. 대중을 기쁘게 하는 열중(悅衆) 소임부터 차를 준비하는 다각(茶角), 수행을 뒷바라지하는 원주까지. 각자 맡은 바 역할을 다하면서 수행하니 불협화음이 있을 수 없다. 저잣거리의 우리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원칙과 법치, 그 실천 현장이 바로 선방이다.

불청객의 밥이 뜸들여지는 동안 차를 우려내는 스님의 말끝에 나그네는 산죽 이파리에 찔린 듯 묻는다. "참선 중에 단전의 생살이 타는 냄새를 맡는다고요?" 그러자 그가 화두를 밀어 붙이면 열이 올라 그런다고 말한다. 선방에 앉아 화두를 든 동안의 단전은 용광로와 다름없나 보다. "참선하면 자신이 정리됩니다. 우리라고 왜 색욕이 일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색욕을 한참 들여다보면 나가떨어집니다. 다른 업도 녹아버립니다."

객실을 나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선원 주위를 둘러본다. 선방 스님들이 등산화를 신고 산행을 준비하고 있다. 수행은 치열할 것이나 눈망울은 하나같이 순한 산짐승처럼 맑고 선하다. 나그네의 소설과 산문집을 읽었다며 두서너 스님이 반가워하며 합장한다.

방 주인의 인품과 어울리는 염화실은 선방 우측에 있다. 서옹 큰스님께서 수행승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공부한 정도를 점검해주는 방이다. 그 염화실의 기둥에 걸린 주련이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중국 임제선사가 남긴 선어(禪語)로 '서는 자리마다 주인공이 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서옹스님이 말씀하시는 선이란 무엇일까.

"자기 참모습에서 살자는 수행이 선인 거라. 선방이든 저잣거리든 어디서나 그런 마음을 지니는 것이 선이지요."

스님은 91세로 성철·향곡 등 구도의 도반이 다 먼저 가버리고 혼자 남았다고 겸연쩍어 하신다. 그러나 참선을 당부하는 큰스님의 목소리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다.

"참선해야만 자기 참모습을 깨달을 수 있어요. 참모습이란 이런 것이지요. 욕망과 집착을 떠나 자유자재한 모습이고, 너와 나란 분별 없이 자비심 넘치는 모습이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생사가 없는 모습인 거라."

스님께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시는 '참모습'이란 단어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 생사를 초월한 모습이라니 갑자기 심오해져 버린다. 나라고 부르는 나를 버려야만 비로소 보이는, 육신의 시력이 아닌 반야의 눈을 떠야만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일 터이다. 그래서 일찍이 부처를 가리켜 제자들이 '눈을 뜬 이여, 거룩한 이여'라고 불렀던 것이다.

선방을 잠시 벗어나 큰스님 방에 나그네를 따라 무료 입장한 두 스님이 곡진하게 합장을 한다. 나그네도 일어나 예를 갖추고 물러선다. 참모습이 아닌 허상을 좇으며 울고 웃어 왔던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문득 인생을 낭비했다는 자책이 들기도 한다. 좋은 글을 써 이름을 얻고자 했고, 이웃이 자신과 한 몸이란 것을 몰랐고, 성정에도 맞지 않게 부를 좇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고, 너와 나를 편가르지 않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는 그런 참모습이 바로 '본래의 나'이자 '행복한 나'이리라. 내가 누구인지, 나의 참모습을 알고 싶다면 누구라도 당장 깊은 산중이든 번잡한 저잣거리이든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참선아 놀자' 하고 어화둥둥 선(禪)을 껴안아볼 일이다. 방을 나서니 어느새 돌담 아래 잔설도 봄기운의 따뜻한 햇살을 받아 작별을 고하고 있다.

<소설가>

세상사가 휙휙 돌아가고 허위가 난무할수록 참된 나를 찾으려는

갈증은 더욱 간절해진다. 화두를 붙들고 용맹정진하거나 가난·청결·

순명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려는 곳이 선방이고 수도원이다.

그곳을 소설가 정찬주씨와 서양화가 이창분씨가

격주로 번갈아 가 세속의 때를 벗고 맑은 자아 찾기에 나선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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