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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의 전 재산은 대통령 신임뿐이잖아요”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역대 최장수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 때의 정일권 총리다. 6년7개월을 재임했다. 정운찬 총리(40대)를 뺀 앞선 38명(김종필 전 총리가 두 차례 재임) 총리의 평균 재임 기간이 1년4개월인 것과 견주면 당시 박 대통령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다. 후배(만주 군관학교)를 대통령으로 모시면서 최장수를 누린 그의 처세는 지금도 전설처럼 세인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런 그도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러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다. 총리 시절 그를 모셨던 신경식(전 한나라당 의원) 육아TV 회장이 전하는 일화.

“정일권 총리가 이후락 비서실장과 함께 미국 워싱턴을 방문, 존슨 대통령과 만났다. ‘월남 파병에 대한 후속 조치와 조속한 경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일은 성공리에 끝났다. 존슨 대통령과 정 총리가 악수하는 장면이 신문 1면 머리기사로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정작 신문을 본 박 대통령은 씁쓸해했다. 이 실장을 불러 ‘정 총리가 언론 플레이를 한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잘나가는’ 2인자에 대한 견제이자 불편한 심기를 이렇게 표출한 것이다. 이를 눈치챈 이 실장이 재빨리 ‘워싱턴에서 정 총리가 각하께 전화 걸 때 제가 옆에 있었습니다.

정 총리는 수화기를 잡은 채로 연방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대며 각하께 절을 했습니다. 각하에 대한 존경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그제야 누그러져 정 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베풀며 치하했다.”

대통령과 총리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흘렀지만 대통령과 총리의 관계와 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총리는 대통령의 협력자이면서 끊임없이 견제받는 자리였다. 김영삼(YS) 대통령 때 이회창 총리는 법이 정한 대로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의 주례보고를 받겠다고 요구했다 YS의 진노를 샀고 결국 사퇴로 이어졌다. DJP 연합의 공동정부로 출발한 김대중 정부에서조차 총리(김종필·박태준)가 의욕을 보이면 청와대는 불편해했다. 고건 전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했지만 청와대의 견제로 국회 시정연설 하나 맘대로 하지 못했다.

한국형 총리는 기형적이다. 예산·인사권 같은 실질적 권한은 없으면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2인자 노릇을 하도록 돼 있다. 기형적 구조 속의 총리는 외풍을 많이 탈 수밖에 없다. 선거 패배나 권력형 비리 같은 대형 스캔들이 났을 때 총리는 성난 민심을 달래는 민심 수습용, 국면 전환용 개각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총리의 부재가 국정 운영에 실질적 타격을 주진 않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상징 때문에 총리를 바꾸면 뭔가 크게 바꾸는 것처럼 세상에 비친다.

이번에도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방선거 패배 책임을 둘러싼 한나라당 소장파와 청와대 참모 간 갈등에 정운찬 총리가 휩쓸리고 있다. 진원지는 ‘정운찬 거사설’이다. 정 총리가 청와대 참모진의 개편을 대통령에게 요구하고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퇴할 것이란 소문이 증폭되면서 청와대 참모진과 당 소장파 의원들 간 전선이 거칠어지고 있다. ‘거사’는 불발됐지만 청와대 참모진은 “소장파가 정 총리를 앞세워 청와대에 총구를 겨누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소장파들은 “정 총리의 인적 쇄신 요구를 참모들이 막고 있다. 쇄신 요구를 권력투쟁으로 몰고 있다”고 비판한다.

세간의 관심은 정 총리의 거취에 쏠리고 있다. 방향은 세 갈래다. 자진 사퇴냐, 경질이냐, 유임이냐. 임명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 후 열흘이 넘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어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게 있다. 현재의 총리제를 이대로 유지해야 하느냐의 문제다. 책임은 권한이 주어질 때 비로소 물을 수 있다. 권한이 없는데 책임을 묻는다는 건 눈가림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엄청난 권한을 부여하고도 거기에 따르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직무유기다.

총리직의 운용엔 비용도 적잖게 든다. 총리실의 방대한 인력과 조직은 물론 국회 인사청문회와 임명 동의 절차를 통과하는 데 드는 정치적 비용도 만만찮다. 이렇게 공들여 뽑아 놓고도 정작 총리에게 주어지는 권한과 책임은 명확지 않다. 생산성에 비해 비용이 훨씬 큰 고비용 구조다. 총리실 직원들조차 “총리의 전 재산은 대통령의 신임뿐”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다.

지난해 국회 헌법연구자문위원회는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분점하는 이원정부제를 1안으로, 4년 중임의 정·부통령제를 2안으로 하는 개헌안을 내놨다. ‘고비용 총리’ 구조를 청산한다는 차원에서도 개헌은 필요하다.

정치 에디터 jm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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