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과 열일곱 동화 같은 歌 이미연 감독'버스, 정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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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이미연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버스, 정류장'(사진)은 서른두살 남자와 열일곱살 소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두 남녀는 각기 화살을 맞고 숨은 짐승처럼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 보습학원 강사로 생계를 꾸리는 재섭(김태우)은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과 누추한 현실의 괴리로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산다.

한때 자신의 아이를 가졌던 여자 친구가 태연스런 얼굴로 결혼 소식을 전해오고 오랜 만에 만난 동창들은 주식 투자며 아이 교육등 세속적인 대화에 여념이 없는 현실. 남들에겐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그에겐 더없이 버겁다. 재섭의 수강생 소희(김민정)는 부패한 공무원 아버지와 불륜을 저지르는 어머니 사이에서 방황하며 원조교제까지 한다.

이들의 사랑은 달콤하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다. 호기심과 격정이 반반쯤 섞인 순간의 연애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떠나도 다시 돌아오는 버스와 정류장의 관계처럼 상대를 이해하고 묵묵히 기다리는 사랑을 택한다.

남자는 소녀를 위해 청바지를 사입고 운전 면허 시험을 보며, 소녀는 진실 게임 대신 거짓말 게임을 빌려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이들의 사랑 가꾸기는 영화 전반에 깔리는 루시드 폴의 촉촉하고 서정적인 음악처럼 잔잔하다.

이 점이 '버스, 정류장'의 매력인 동시에 분명한 한계다. 타인과의 소통, 사랑을 통한 치유 등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했던 설정은 플레이 버튼을 한번 누르고 나서 음반이 다 돌아갈 때까지 내버려두는 식의 보여주기를 통해서는 더 이상 새로움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을 자신이 없으니까 어영부영 사는 거겠지" "사람은 왜 꼬박꼬박 살지? 띄엄띄엄 살 수 없을까"하는 식의 대사가 울림을 갖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지극히 익숙한 주제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대한 고민이 아쉽다. 8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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