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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史 哲·詩 書 畵 대가 '秋史의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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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문필가는 '학삐리'와 '딴따라' 두 유형이 있다. 그렇다면 유홍준은 '딴따라'에 가깝다." 미술사 연구자로서 외도였던 시리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한창 각광받을 무렵 백낙청 (서울대·영문과) 교수가 던진 농담 섞인 말이지만, 그건 이미 예전 분류다. 1998년 이후 연속해 출간한 『조선시대 화론 연구』(학고재), 『화인열전』(역사비평) 등 미술사 관련 '학삐리 본업'으로 돌아온 그가 득의의 카드를 마저 뽑았다. 20년 전부터 품어왔다는 완당(阮堂) 김정희(1786~1856) 연구서 『완당 평전』은 분명 주목거리다.

우리 독서계에서도 제대로 된 작업이 드문 평전이란 형식의 선택이고, 완당에 관한 첫 평전이라는 점부터 그렇다. 거기에다 무엇보다 서술 대상 자체가 위력적인 완당이다.

시·서·화·금석학은 물론 불교·고증학 등에 걸쳐 일가를 이뤘던 완당의 모습을 젊은 시절부터 말년의 노과(果·과천에 산다 해서 지은 호)까지 한 인간으로 조망한 것은 보기 드문 작업이다. 현대의 학문 분류상 미술사가인 유홍준(명지대) 교수로서도 어쩌면 버거운 일일 수 있었다는 판단도 불가피하다.

평전의 첫머리에서 유교수는 겁부터 준다. 옹방강·완원같은 청나라 학예인들에게서 최고의 대접을 받은 완당은 '오르기 힘든 산'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틀을 벗어난 근세 동북아의 모더니스트로서 이전의 최치원과 이제현, 현재의 백남준·정명훈 등을 능가하는 지속적인 국제 명성을 생존 당대에 얻었다.

日학자 "淸朝學연구 1인자"

'청조문화 동전(東傳)의 연구'를 하던 일본학자 후지쓰카 지카시가 내린 결론인 "완당=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도 떠올려 봄직하다.

그런데 완당 사후 10년 제자들이 묶어낸 『완당선생전집』은 편지·시 등으로만 구성돼 본격 저술을 찾기 힘들어 완당의 사상과 삶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두겹으로 힘들 수밖에 없다는 게 유교수의 고백이다. 후기에서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고 숨은 자료는 또 얼마나 될까"라고 걱정을 하면서도 그가 나선 사정은 이해할 만하다. 이 책으로만 보면 완당 연구를 하기로 작심한 후 20년은 허투루 보낸 세월이 아니었다는 느낌을 준다.

유배지서 완성한 추사체

다산 정약용과 교유했다는 아암 혜장 스님의 초상 윗부분에 33세의 완당이 그를 찬미한 시를 적어놓은 '아암장공완역소상'의 사진은 유교수가 사숙했던 동주 이용희 선생의 유품에서 찾아냈다. 글씨와 서찰·편액 등 각종 자료는 그가 아니었다면 모으기 힘들었을 진귀한 것들이다. 이를 바탕으로 완당의 삶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사실 추사체는 천재성으로만 빚어진 것이 아니다. 24세에 연경에서 만났던 학자들과 책·탁본·서화를 교환하며 습득한 지식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 청에서도 놀랄 정도의 성취를 이뤘지만, 당쟁으로 제주도에 귀양가 고생을 겪고 나서야 해탈과도 같이 추사체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완당은 옛것을 연구해 새것을 만들어 낸다는 고증학의 기본정신인 '입고출신(入古出新)'을 청인들보다 제대로 구현했다. 그러나 청년기에 힘이 넘치던 글씨가 말년에는 불필요한 기름기가 빠지고 파격과 개성을 드러낸다.

추사체를 놓고 '괴(怪)'하다는 평가가 있자 완당은 "구양순도 안진경도 괴가 아니면 무엇이냐"(5백81쪽)고 했다. 모두가 과거의 것을 알고 그것을 뛰어넘는 '아방가르드'였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연경행 이후 또 다른 전환점인 유배지에서 완당은 무엇을 겪은 것일까. 완당은 가옥에 가시 울타리까지 두르는 유배 중에 제일 혹독한 위리안치를 당했다.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현실에 쫓기기만 했던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책에서 보이듯 유배 전과 후 완당이 변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는 여럿이다. 시골 서생 이삼만을 만났을 때 일이다. 제주도로 가던 중 전주에 들른 완당에게 71세 노인 이삼만은 글씨를 보이고 평을 부탁했다. 한참 동안 말을 않던 완당은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귀양살이 8년이 지난 후 완당은 집으로 향하며 이삼만에게 들렀다. 이미 이삼만은 3년 전에 죽었다. 완당은 그의 묘비명을 손수 써주는 변화를 보였다.

최고의 석학들과만 교류하며 기고만장했던 완당은 유배 이후 완숙미를 갖춘 노년의 모습을 보여줬다.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 돌아가게 하고…'(4백34쪽)로 시작하는 현판 '유재(齋)'와 풀이글이 그런 심정을 나타낸다.

사상의 실체 규명 미진

그러나 평전 속의 완당에게 아쉬움은 남는다. 청나라 학자들과 오고가면서 얻은 사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이상보다 현실을, 관념보다 사실을 더 중시한다는 북학파가 어떻게 논리화·토착화해 갔는지가 규명돼야 학예 최고봉으로서 완당의 자리매김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유교수는 한문 독해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경학(經學) 등에는 문외한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왕 물꼬를 텄으니 유독 그가 아니더라도 분야를 넘나드는 깊이 있는 완당 연구가 이어져야 한다. 출간 예정인 완당평전 3권 『자료·해제편』이 자료에 대한 목마름을 다소 해갈해 주고, 학고재·동산방에서 기획해 전국을 순회하며 전시한다는 '완당과 완당바람'(20일부터)이 대중적 관심을 환기해 주길 기대하며 곁들인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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