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惡의 축'이 재선의 축 겨냥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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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연초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악의 축'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을 때 희미하게 연설문 작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후 미 정부가 이란·이라크·북한을 거론할 때마다 '악의 축'이란 말을 거듭 사용하면서, 정치적 선전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면으로 보나 대통령이 정치적 선전을 위해 이렇게 전투적인 언어를 구사할 계제는 아니었다.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을 발언하자 외무 당국자들은 당황했고 우방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경종이 너무 커 부시 대통령은 한국을 찾았을 때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공식 천명해야만 했다.

'악의 축'3개국을 한데 묶을 공통점은 없다. 이란·이라크는 오래 전부터 앙숙관계며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전체주의정권이다.

이처럼 무리하게 설정된 '악의 축'은 사실상 '재선의 축'을 겨냥한 것일지 모른다.진짜 '3개의 축'은 해외 아닌 미국 내에 있다. 바로 부시의 지지율 끌어올리기, 20년 만에 최대인 군비지출 통과시키기, 까다로운 공화당 보수파 달래기가 그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9·11테러 이후 리더십을 발휘한 것은 높이 살 만하다. 그는 신속하게 탈레반 정권을 전복시켰다. 그러나 부시는 군사적인 성공이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 잘 알고 있다. 걸프전 말기 그의 아버지는 하늘을 찌르는 인기를 누렸으나 경제상황에 무관심했던 바람에 재선에 실패했다. 아버지 부시는 당시의 경제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식품업계 회의에 참석해선 슈퍼마켓 스캐너를 처음 보는 듯한 행동으로 망신을 샀다.

10년 전처럼 현재 소비자들의 체감경기는 좋지 않다. 에너지업체 엔론의 도산 이후 미국에는 국내 모든 기업이 사상누각 아니냐는 의혹이 만연해 있다. 엔론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은 공화당 사람들이고 속속 드러나는 대기업들의 문제점과 가장 깊게 관련된 정당도 공화당이다.

사실과 무관한 '악의 축'을 멋대로 만들어내 해외에서 지속적인 저(低)강도 갈등을 유발함으로써 해결단계에 있는 국제분쟁을 되살려내고 불안정한 국내경제로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리는 것은 대통령과 여당에만 득이 될 뿐이다. 애슈크로프트 법무장관이 낸 '테러 보고서'는 구체적인 용의자나 실제적 대책 없이 막연하게 테러위협을 들먹임으로써 이런 현상을 부추긴다. 테러의 여파로 국방예산은 늘어났고 중앙정보국(CIA)의 힘도 커지고 있다. 강경파들은 미국의 일방 독주가 굳어지는 것을 보며 만족해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부시 대통령은 강력한 군 통수권자로서의 위상만 잘 다지면 차기 선거도 문제없이 치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지금 두려움에 빠져 있다. 이들은 추가테러를 두려워 한다.비행기와 고층건물에서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대기업들이 속빈 강정이 아닐까 두려워한다. 자녀들의 미래가 전보다 더 위험해진 게 아닐까 두려워한다.

바로 이것이 현재 미국이 당면한 위기다.실체가 없는 '악의 축'을 겨냥해 무력 시위를 벌임으로써 이 위기에 대처하겠다는 태도는 지도력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다. 시리얼 상자를 스캔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망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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