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하거나… 혹은 어디서 봤거나… '류승완式 비빔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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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류승완 감독은 신작 '피도 눈물도 없이'를 '펄프 누아르'라고 소개한다. 퀜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에서 따온 펄프와 '필름 누아르'의 누아르를 결합한 조어다. 풀이하자면 '싸구려 대중 소설처럼 가볍고 통속적인 누아르 영화'쯤 될까.

누아르 영화는 세상을 음모로 가득찬 부조리한 대상으로 규정하는 까닭에 전통적인 누아르물의 기본적인 정조(情調)는 어둡고 냉소적이다. '펄프 누아르'는 그래서 모순된 조어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손수 장르를 명명하고 나선 감독의 에너지를 가볍게 볼 것만은 아니다. 류감독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다치마와 리'등의 전작에서 익히 보여줬던 피 튀기는 액션과 욕지거리 낭자한 대사로 웃음과 경쾌함을 안겨주는 동시에 치밀한 플롯을 통해 이 세상은 빼앗지 않으면 빼앗기고 마는 '피도 눈물도 없는'것이라는 하드 보일드 소설(비정하고 건조한 문체의 소설)식의 결말을 제시한다.

그래서 '피도 눈물도 없이'의 무대는 상징적이게도 탐욕과 음모가 판치는 투전판이요, 등장하는 인물들은 희망이라야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따라지 인생'들이다. 투견장을 관리하는 전직 권투선수 독불(정재영)과 그에게 늘 맞고 욕 먹으면서도 할 수 없이 발목 잡혀 사는 라운드걸 출신 수진(전도연). 독불은 크게 한 재산 모아 큰손들의 굴욕적인 똘마니 노릇을 면하는 것이, 수진은 늘 선글라스로 가려야 하는 왼쪽 눈가의 흉터를 치료하고 가수로 데뷔하는 것이 꿈이다.

이들과 견주어 결코 나을 것 없는 신세이긴 전직 금고털이이자 택시를 모는 경선(이혜영)도 마찬가지다. 빚 때문에 아이도 빼앗기고 빚쟁이들한테 맞고 사는 일이 다반사인 경선의 택시를 수진이 들이받으면서 이들의 인연은 시작된다. 독불의 구타와 욕설이 지긋지긋한 수진은 경선에게 투견장의 판돈이 든 가방을 훔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돈가방을 노리는 사람은 그녀들만이 아니었으니. 수진과 공모한 젊은 정부, 나이트클럽 웨이터인 채민수(류승범)일당, 투견판의 주인인 김금복(신구)과 그의 심복 침묵맨(정두홍) 등이 어지럽게 얽히면서 돈가방을 둘러싼 이전투구가 벌어진다.

감독의 목소리는 명료하다. 투견판보다 더한 것이 사람들의 아귀다툼이라고. 경선이 수진에게 배신당한 줄 알고 치를 떠는 중반부까지 교과서적인 진행을 보이던 영화는 관객의 예상을 기분좋게 배반하는 결말로 이어진다.

이들이 벌이는 피와 눈물이 범벅된 생존 경쟁은 피가 튀기되 심각하지 않다. 이러한 유쾌함의 원천은 홍콩 영화와 할리우드 B급 영화 등의 장르적 관습에 충실하면서 이를 만화적 감수성으로 뒤집은 감독의 재기다. 주먹을 쓰거나 발차기를 하는 장면에서 애용되는 슬로 모션, 처절한 액션 장면에 경쾌한 음악 곁들이기, 그의 스승급이라 할 수 있는 타란티노가 '재키 브라운'에서 보여준 것처럼 화면 분할로 여러 가지 상황을 동시에 설명하기 등 꼽자면 한이 없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차진 구성만큼이나 배우들의 궁합도 잘 맞는 영화다. 특히 말 그대로 온몸을 '던지는' 이혜영의 열연은 중견 여배우들이 설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는 충무로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이어 다시 나이트 클럽 웨이터로 분한 류승범, 인자한 척 하면서 냉혹하게 사람을 죽여 돈을 버는 보스 신구 등 수많은 조연들이 저마다 개성을 획득하며 영화를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이는 첫 장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청스러운 장악력을 지닌 감독에게 공을 돌려야 할 듯싶다. 류감독은 이 영화로 박찬욱·김지운 등과 더불어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만드는 젊은 감독의 대열에 들어섰다. 3월 1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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