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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이 소장파, 총리, 청와대 참모…선거 패배 이후 각자도생 암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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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여권이 어지럽다. 6·2 지방선거 패배의 충격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다. 대신 장막을 비집고 “초선들이 정치를 잘못 배웠다”는 발언만 흘러나오고 있을 뿐이다. 청와대의 침묵은 거꾸로 한나라당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 소장파는 청와대 인적 쇄신을 주장하지만 거기에는 여권의 친이계 주류가 내부 권력투쟁을 벌이는 측면도 있다.

9일 친이 소장파 ‘총리, MB 독대할 것’ 바람잡기
10일 정 총리 “일부 언론보도는 소설 같은 얘기”
초선 50명은 "청와대 참모진 개편 요구” 연판장

“소설(小說) 같은 얘기다.”

정운찬 총리가 10일 국회 본회의에 출석하면서 청와 대 인적 쇄신 요구와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연합뉴스]

정운찬 국무총리가 10일 주변 인사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전날 이명박 대통령에게 인적 쇄신을 건의하려 했으나 일부 청와대 수석이 두 사람의 독대를 막아 이를 무산시켰다는 내용의 언론 보도에 대해서다.

정 총리는 “사실이 아니다”란 의미로 ‘소설’이란 단어를 썼다. 그러나 여권의 권력 관계에 정통한 인사들은 “궁중 암투를 다룬 대하 드라마 같은 일이 실제로 있다”고 전했다. 6·2 지방선거 참패 이후 이 대통령을 둘러싼 다양한 인사들이 책임론의 화살을 피하려고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과정에서 대립과 갈등, 연대의 ‘인간 희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침묵’이 길어지면서 상황은 더욱 극적으로 변해 갔다.

#1 ◆6월 9∼10일(클라이막스)=“정 총리가 이 대통령에게 독대를 요청했는데 일부 수석들이 막아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독대를 할 거다. 그 자리에서 청와대의 대폭적인 인적 쇄신을 건의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총리로서 일하기 어렵다는 점도 밝힐 것이다.”

이 대통령과 정 총리의 주례회동이 진행 중이던 9일 오후 1시30분쯤 여권 관계자가 본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정 총리가 자신의 직을 거는 배수진을 치고 쇄신을 요구한다는 얘기였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 고위 인사도 기자들에게 “대통령과 총리의 독대가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총리실 관계자도 비슷한 얘길 했다. 공교롭게도 모두 한나라당 친이계 소장파와 가까운 인사들이었다. 이날 이 대통령과 정 총리의 독대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수석들이 막은 것도 아니었다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전했다. 권태신 총리실장과 정정길 대통령실장 등이 배석했지만 정 총리가 마음만 먹으면 독대를 요청할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점심식사를 포함, 2시간 반 넘게 회동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사와 관련된 얘기를 꺼낸 사람은 이 대통령이었다. 이 대통령은 “총리가 곧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답변을 하게 될 텐데 거취와 관련된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9일 청와대 주변을 맴돌던 ‘정 총리 거사설’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정 총리가 결심했으나 주변 환경 때문에 쇄신 얘기를 하지 않은 건지, 정 총리가 애초부터 그럴 마음이 없었는지는 불투명하다.

10일 일부 조간 신문이 ‘거사설’을 보도했다. 총리실은 공식 보도자료를 내고 부인했다. “일부 언론의 총리 의중과 관련된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고 했다. 정 총리는 출근길에 “신문을 못 봤다”고 했다. 국회에서 정의화 국회부의장을 만나선 “겉으론 온건하고, 속으로 강인한 게 진정한 카리스마 아니냐”는 말을 했다. 오후 들어 한나라당 초선 50명은 “청와대 참모진 개편을 통한 민심 수습과 국정운영 시스템의 획기적 개선을 요구한다”는 글을 발표했다. 6일 초선 모임을 주도한 친이계 소장파 정태근 의원 등이 다른 초선들을 상대로 연판장을 돌린 결과였다. 소장파 측 일부 인사는 “총리가 11일 대통령에게 인적 쇄신을 요구할 것”이라고 했으나 총리실 고위 관계자는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했다.

#2 ◆3∼5일(발단)=6·2 지방선거 다음 날인 3일 오전 11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춘추관(기자실)을 찾아왔다. 그리고 오전에 있었던 정정길 대통령실장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 내용을 설명해 줬다.

“선거에서 드러난 민의를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수석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가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정 실장이 ‘다 같이 책임지는 게 좋겠다’는 수석들의 의견을 만류했다. 실장이 대표로 사의를 밝혔다. 그러니 ‘(수석) 전원 일괄 사의’라고 쓰면 뉘앙스(어감)가 좀 다르다.”

‘정 실장이 사의를 밝혔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동시에 ‘수석들도 사의를 표명할 뜻은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그건 실장의 만류 때문’이란 묘한 전언이었다. 두 시간 전 한나라당에선 정몽준 대표 등 지도부가 전격 사퇴했다. 정 대표는 “이번 선거는 여야 정치인들이 협력해 국정 현안을 풀어 나가라는 국민의 준엄한 당부”라고 말했다.

당·청의 인식 차이는 곧 갈등으로 번져 갔다. 친박계인 구상찬 의원은 홈페이지에 “청와대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참모진을 교체하고, 총리를 포함한 모든 국무위원들이 물러나고 전면 개각을 단행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친이계 의원들도 “청와대 수석이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는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는 내부 싸움에 빠져들었다. 한 수석의 측근은 “우리 수석이 제일 먼저 사의를 표명했는데 다른 수석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논리를 들어 말렸다”고 변명했다. 또 다른 수석실의 관계자는 “우리 수석이야 언제든 자리를 던질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수석들이 더 많아 청와대가 책임지는 모습을 못 보여줬다”며 책임을 다른 데로 돌렸다. 이런 가운데 이 대통령의 지시로 3일 열릴 예정이었던 청와대 조직개편 회의도 취소됐다. 국정기획수석실 주도였는데 며칠 뒤 논의의 주체가 대통령실장실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청와대 안팎에서는 두 방의 갈등설도 돌았다. 일부 행정관들은 “고위 관계자들이 마치 정리해고를 앞두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회사원들 같다”고 꼬집었다.

#3 ◆6∼8일(전개)= 6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지방선거 결과와 연결해 인사를 할 계획은 없으며, 7·28 국회의원 재·보선 이후에 인사하더라도 최소한의 범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같은 날 정태근·김성식 의원 등 한나라당 초선 23명이 긴급 회동했다. 정 의원은 “국정쇄신의 핵심은 청와대”라며 “개인 의견으론 민심 이반에 가장 큰 책임은 청와대 참모”라고 못 박았다. 익명을 요청한 한 초선 의원은 “수석들이 장관이나 할 생각을 하면서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고 있어 우리가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청와대 측에서 반격이 나왔다. 한 인사는 “지방선거 공천을 (소장파) 몇 명이 했다는 게 사실이냐”고 말했다. 반어법으로 사무총장을 지낸 정병국 의원과 선거 기획을 했고 정태근 의원과 절친한 관계인 정두언 의원 등의 책임론을 제기한 것이었다. 당시 정두언 의원은 목디스크 수술 후 입원 가료 중이었다.

초선들은 초선대로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8일엔 ‘민본21’이 청와대 참모진을 조기 전면 개편하라고 요구했다. 청와대 정무·홍보·민정·국정기획 수석 등을 직접 거명하며 “이들을 포함한 전면 개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친이계 소장파가 정 총리에게 손을 내민 것도 이 무렵부터란 전언이다. 이들과 가까운 한 인사는 “평소 정 총리와 교감해온 소장파 인사 몇 명이 주 초에 정 총리와 의견 교환을 했던 것으로 안다”며 “인적 쇄신을 강하게 요구해야 이 대통령이 바뀔 것이다. 그래야 총리가 만신창이가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거부감도 노골화됐다. 청와대 인사들은 공공연하게 “총 쏘는 얘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며 “정당투표에선 한나라당이 이겼는데 (소장파를 비롯한 의원들의) 지역구에선 왜 졌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초선의 싸움이 커진 것이다. 이 둘 사이에 정 총리가 끼인 형국이나 그의 생각은 소장파 쪽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친이계 소장파 일부 의원들 간의 갈등은 해묵은 것이다. 2008년 인수위 시절과 4월 총선 당시 이상득 전 부의장을 중심으로 한 원로그룹과 정두언·정태근 의원 등 소장파는 공개적으로 충돌했었다. 정두언 의원이 이번 선거 때 당직을 맡으며 ‘복권’됐지만 원로그룹과는 여전히 불편한 관계다. 원로그룹과 가까운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과 박영준 국무차장과도 껄끄러운 사이다. 이들은 정 총리를 둘러싸고도 갈등을 벌였다. 정 총리의 임명을 적극 지원한 소장파는 김유환 전 국정원 경기지부장을 총리실 정무실장으로 천거했다. 그의 임명은 늦어졌는데 박영준 차장이 반대했다는 주장이 흘러나왔다. 이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대통령은 최근 “초선들이 정치를 잘못 배웠다”며 초선들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은 전했다. 이들은 “대통령이 가만히 있는 건 쇄신과 관련해 아직 대안이 없고, 준비가 잘 안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7·28 재·보선 이후에 한다고 발표한 것도 자꾸 말이 나는 걸 피해 보려는 뜻에서였다고 한다. 이 대통령이 지방선거 참패 이후 한 말은 공개되지 않은 자리에서 “이번 선거 결과를 성찰의 기회로 삼고, 경제 살리기에 전념하자”고 한 게 전부다.

고정애·서승욱·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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