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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민영화 승부수'판정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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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가스에 이어 철도 노조가 파업을 철회함에 따라 사상 초유의 공공노조 연대파업은 사실상 진정됐다. 홀로 남은 발전 노조가 사측과의 협상 타결을 서두르고 있는데다 발전 부문의 파업이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외견상 노조측은 민영화 철회 요구를 포기하는 대신에 '근로조건 개선'이라는 실리를 얻었고, 정부와 사측은 민영화 방침의 당위성을 노동계에서 재차 확인받았다. 하지만 노동계가 얻었다는 과실을 들여다보면 국민의 기초 생활을 볼모로 모험을 건 데 비해 그 실리가 너무 적었다. 정부 역시 파업 처리 과정에서 정책의 미숙함을 드러냈다.

◇노조=당초 주장을 되돌아보면 이번 파업은 노조측의 판정패다. 철도·발전·가스 노조가 총파업 강행의 최대 명분으로 내걸었던 것은 공기업 민영화 저지였다. 하지만 이는 지난 25일 파업 돌입 직후 가스 부문부터 무너졌다. 3개 노조 중 가장 먼저 협상을 타결한 가스 노사는 합의서에서 "정부는 가스산업 구조 개편을 추진함에 있어 노조의 합리적 대안을 검토하고, 시기·시행방법에 대해 노사정 간의 논의를 통해 해결한다"고 밝혔다. 가스공사측이 기존의 구조 개편 방침을 그대로 밀고 나가되 노조측의 의견을 참고하겠다는 뜻이지 민영화를 철회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철도 분야의 경우도 마찬가지. 방용석 노동부 장관은 지난 22일부터 철도 노조에 '민영화 철회 절대 불가'를 통보했다. 철도청은 합의안에서 애매모호하게 민영화 문제를 언급했다. 그러나 합의 직후 정부 관계자들은 잇따라 "철도 민영화를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해고근로자 복직이 철도·가스노조의 두번째로 큰 요구사항이었다. 철도 노조는 막판까지 이 문제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사측 제안에 따랐다. 1990년 이후 해고된 58명의 근로자들에게 산하 단체의 취업을 알선한다는 것이 철도청의 대안이었다. 일자리를 알아봐주겠다는 뜻이지, 공직에 복직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노총 이남순 위원장은 지난 25일 중앙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58명 중 절반만이라도 복직시킨다는 기대를 가지고 협상에 임하겠다"고 말한 바 있지만 결국 막판에 포기한 셈이다.

철도 노조가 얻어낸 가장 큰 과실은 근무 조건 개선이다. 철도 근무자들은 하루 24시간을 2개조로 나누어 맞교대로 일해 왔다. 과로에 따른 직업병 빈발 등 근무 조건이 다른 업종에 비해 턱없이 열악했던 것이다. 이번에 근무조를 3개로 늘려 하루 두 차례 근무교대를 하는 쪽으로 작업조건을 바꿨다. 하지만 파업에 따른 여론 악화를 감수하면서까지 파업을 강행한 데 따른 소득으로는 미미한 수준이다.

가스 노조는 '이사회에서 근로 조건과 관련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합의를 이끌어내 체면을 유지했다.

◇정부·사용자=정부는 그동안 공기업 노사 문제에 있어 아킬레스건처럼 여겨왔던 민영화 문제와 해고자 복직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 철도 등 3개 공공 노조의 처리과정은 앞으로 다른 공기업들이 분규를 일으킬 때 선례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이번 파업으로 국민 여론이 민영화의 당위성에 기울면서 정책 수행에 힘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전에 충분히 노조의 근로조건 개선 요구를 받아들여 파업을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면계약설=가스와 철도 노사 협상에서 겉으로 드러난 합의사항 외에 별도의 합의사항이 있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

사측은 주동자들의 사법처리 수위에 대한 노조측의 선처 요구를 일축했다고 하지만 파업 장기화를 우려하는 정부가 막판에 선처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동계에서는 손학래 철도청장이 합의문에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철도청 해고 근로자들을 가급적 복직시키도록 노력하다가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자회사인 홍익회 등에 취업시키기로 약속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임봉수·박현영·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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