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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 항생제 남용 위험수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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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 18일 충남의 한 양돈 농장. 축사 주변에 빈 항생제 부대 3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농장 직원은 "무슨 질병이 도느냐"는 질문에 "병 때문이 아니라 예방 차원에서 사료에 항생제를 넣고 있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는 "항생제 투여량은 농장 관리자가 알아서 그때그때 정한다"고까지 소개했다.

정부는 2000년 항생제 남용을 막는다는 명문으로 국민 불편과 의료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의약분업을 실시했다. 하지만 정작 인체용 항생제와 성분상 차이가 없는 가축용 항생제는 아무 제한없이 유통돼 국민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특히 최근 몇년 새 일부 가축용 항생제의 사용량이 매년 1백%씩 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20일 농림부와 한국동물약품협회에 따르면 최근 4년간(1996~2000년) 주요 사료첨가용 항생제의 판매량이 2~4배 늘어났다.

같은 기간 한우의 사육마릿수는 44% 줄었고, 돼지·닭의 사육마릿수는 20~30% 느는 데 그쳤다. 항생제가 범벅된 육류가 식탁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항생제를 남용하면 가축 세균들이 웬만한 항생제엔 죽지 않게 돼 세균성 질환이 돌아도 적절히 대처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우려가 일부 지역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강원대 수의학과 김두 교수는 "최근 가축에서 분리된 세균(포도상구균)에 대표적인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주사한 결과 균 가운데 96%가 살아남았다"고 소개했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지난해 유방염에 걸린 소의 젖 10%에서 웬만한 항생제로는 죽일 수 없는 세균(메치실린 내성 포도상구균)이 나왔다고 밝혔다. 또 최근 수의학계에는 페니실린 쇼크로 가축이 죽었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다. 항생제가 남용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제는 고기·우유·계란 등 축산물에 다량의 항생제가 남아있다가 인체에 들어올 수 있다는 점이다. 항생제로 죽이기 힘든 슈퍼박테리아가 사람에게 그대로 전파될 수 있다.

삼성서울병원 감염내과 송재훈 교수는 "퀴놀론계 항생제가 첨가된 사료를 먹은 닭에서 살모넬라 내성균이 발견됐고, 이 닭고기를 먹은 사람이 살모넬라균 식중독을 일으킨 사례가 외국에서 이미 보고됐다"고 경고했다.

국내 일선 농가는 처방전 없이 가축용 항생제를 무한정 구입할 수 있다. 또 치료가 아닌 예방 목적으로 제멋대로 사용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특히 가축에 질병이 돌기 쉬운 환절기에는 업체들이 아예 사료에 항생제를 넣어 공급하는 '클리닝 서비스'를 하고 있다. 수의사 S씨는 "이런 클리닝 서비스가 버젓이 성행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국사례·대책=세계보건기구(WHO)는 가축사료에 항생제를 첨가하지 말도록 권장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항생제는 반드시 수의사의 처방에 의해서만 사용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미국 의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전세계 항생제의 절반이 가축에게 사용되는데, 이 항생제의 80%가 불필요하다. 이로 인해 인간의 항생제 내성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동물병원협의회 관계자는 "가축 항생제가 남용되는 근본 원인은 농장에 자가(自家)치료를 허용한 것"이라며 "이를 폐지해 일부 항생제는 처방전이 있어야만 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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