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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의 물꼬를 업그레이드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너무 복잡해 따라잡기 힘든 각종 게이트, 삐걱대는 한·미관계와 이에 따른 외교 수장(首長)의 시도 때도 없는 교체…. 이런 거대 현안에 대한 사람들 관심은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유는 두가지다. 권력 엘리트의 부도덕과 무능에 질렸고, 무엇보다 고만고만한 수준의 논의에 지쳐버린 탓이다. 일례로 대중가수 유승준의 병역 파문만 봐도 그렇다. 왜 모든 논의가 개인적 스캔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 통에 젊은이들을 옥죄는 군대라는 실체는 건드리지 않는가? 쳇바퀴 논의를 벗어나 논의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은 사회적 금기마저 깨는 용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통념'이란 이름의 빅 브라더를 의식지 않는 진정한 대안적 논의 말이다. 그런 흔적은 책 같은 출판물과 TV·신문 같은 미디어별로 아주 없는 건 아니라서 아쉬운대로 숨통 역할을 한다. 유승준 파문부터 살펴보자. 이 사건의 원인(遠因)에는 군대문화의 억압적 역기능이 자리잡고 있다. 한데도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 속에서 '징병제→모병제 전환'을 거론한 선구적 논의가 있었다. 귀화 러시아인 박노자 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이다.

"권위주의적 한국사회에서 군대는 보스에 맹종하는 충견을 기르는 양견장이다. 남침 위협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병의 사기나 전문성이 낮은 의무군대보다는 모병제가 더 적합할 것이다. 징병제를 성역으로 만들어 놓고 서구 국가 같은 병역 거부권을 허용치 않으려는 당국은 군대의 교육적 효과를 의식하는 것일까? 이 병폐를 혁파하는 첫 단계로 양심적 병역 거부권부터 인정해야 한다."(1백11쪽 요약) 한국인의 정서상 논쟁의 여지가 있는 발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유엔에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논의를 위한 제안문을 제출(본지 2월 5일자 42면)했다는 걸 보면, 1970년대 상황과 또다른 '업그레이드 인권 논의'의 물꼬가 터지는 조짐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해방 후 여러 사정이 겹쳐 쉬쉬해온 사안들에 대한 대중적 논의를 시도하는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관심을 둬야 한다. 최근 방영된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편이 그렇다. 본지도 방송평 '가짜 김일성론은 가짜다?'(5일자 45면)를 통해 이 다큐를 높이 평가했지만, 그건 해방 후 반세기 동안 귀 막고 눈 가려온 참담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다.이런 문제 제기는 출판물에서도 일부 보인다.『나의 아버지 여운형』(여연구 지음, 김영사)의 경우 몽양 여운형과 김일성 사이의 정치적 교감과 함께 인간적 우의의 과정을 서술해 충격적이다.

이 책은 미 군정청이 몽양 딸들의 미국 유학을 제의하자 그걸 '볼모 확보'로 판단해 외려 딸들을 북한으로 보냈다는 것, 그건 몽양의 결정이라고 밝힌다. 김일성을 이런 방식으로 드러낸 것 자체가 '가짜 김일성론'의 허구를 증명한다.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풍토 속에서 나오는 이런 용감한 문제 제기에는 '논의의 물꼬 상' 같은 걸 줘야 할 판인데, 다음 회에는 자기 색깔(이념)을 드러내 분명히 하려는 최근의 다양한 움직임, 대미(對美)관계를 중심으로 한 탈 금기의 논의 등을 살펴볼 참이다.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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