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설… "5년 만에 가족과 차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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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설이 이렇게 기다려지기는 내 인생 처음입니다."
임영수(가명·36)씨는 5년 만에 가족과 맞는 설이 감격스럽다.
자그마한 웨딩숍을 운영했던 임씨에게 1997년은 악몽의 해였다.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점점 빚이 불어났고, 끝내 가진 재산을 모두 날렸다.
노모와 부인, 두 아들·딸을 두고 98년초 집을 나온 그는 노숙자가 됐다.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을 극복할 힘이 그에겐 없었다. 거리에서 잠을 자고, 무료 급식대 앞에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며 신세를 한탄했다.
그 사이 부인과는 이혼을 해야 했다. 노숙자 쉼터를 거쳐 강서구 가양4 복지관 내 노숙자 자활시설인 '희망의 집'에 옮겨간 뒤에도 그의 방황은 한동안 계속됐다.
"그런 나에게 마지막 힘이 된 것은 가족들이었지요."
가출 2년 만에 그는 경기도 고양시의 단칸 쪽방에서 근근이 살고 있는 노모(61)와 딸(초등4년)·아들(초등3년)을 찾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버지를 처음엔 피하던 아이들이 헤어질 때쯤 울음을 터뜨리는 걸 본 임씨는 가슴을 쳤다.
"다시 가정을 되찾아야겠다는 결심이 솟더군요."
마음을 다잡고 일을 찾아 나섰다. 복지관 사회복지사들의 도움으로 몇 번의 도전 끝에 2000년 4월 드디어 택시 운전기사 자격증을 얻었다. 가끔씩 코피를 쏟는 고된 일이었지만 가족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힘든 줄 몰랐다.
남아 있던 빚을 갚아가며 강서구 화곡동에 방 두칸짜리 월셋집을 마련한 게 지난해 10월 말. 헤어진 가족들이 드디어 한 자리에 모였다.임씨는 "늘 침울하던 아이들이 웃음을 되찾은 게 무엇보다 기쁘다"고 했다.
이번 설날 그는 차례를 지낸 뒤 아이들 손을 잡고 가까운 친척을 찾아가려 한다.
"밑바닥 생활 때 복지관 직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재기를 못했을 겁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겠습니다."
긴 나락의 터널을 지나 다시 아이들과 함께 설을 맞는 임씨의 다짐이다.
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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