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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친일진상규명, 신 연좌제 안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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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말도 많던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이 국회 행자위에서 표결로 통과됐다. 친일진상규명법은 16대 국회 막바지인 올 3월 초 우여곡절끝에 제정됐으나 열린우리당이 친일 행위 조사 대상 등이 축소됐다며 17대 국회에서 다시 개정안을 마련했다. 행자위를 통과한 개정안은 조사 대상을 친일반민족 행위자에서 행위로 바꿨고, 동행명령 불응자에 대해서도 형사처벌 대신 과태료 부과로 완화했다. 일부 보완은 됐지만 근본적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정치적 공세를 위해 자락을 깔아놓은 대목이 눈에 띈다. 조사 대상을 일본군 중령급 이상에서 소위급 이상으로 낮추고, 경찰과 헌병은 물론 동양척식회사.식산은행 간부를 포함시킨 것부터 의도가 의심스럽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군 경력과 여당 지도급 인사들의 부친이 일본 헌병과 식산은행 간부를 지낸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과거사 규명의 본래 의미는 퇴색되고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누구는 친일파의 자손"이라는 식의 반인권적 신 연좌제가 판치지 않도록 극구 경계해야 할 것이다.

조사위가 대통령 산하 국가기구로 규정된 것도 문제다. 정치적으로 독립되지 않으면 의문사위의 전철을 밟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좌우 대립의 비극적 역사 때문에 독립운동사의 한쪽은 알면서도 묻어두고 있다"고 했으니, 위원회가 좌파 독립운동을 드러내는 데 역점을 맞출 가능성도 있다. 법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시 보완하기 어렵다면 전문성과 독립성.중립성을 갖춘 위원을 찾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대통령 몫 조사위원들을 한쪽 성향으로 선정하고, 야당은 그 반대 성향의 위원들만 추천한다면 조사위는 여야의 대리전이나 벌이는 곳으로 전락할 것이다.

친일 진상의 규명은 필요하다. 그러나 갈등과 분열, 인신 공격과 신 연좌제에 악용하는 진상 규명이 돼서는 안 된다. 정치적 청산이 아니라 역사적 청산이 되도록 정치권과 국민이 지혜를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