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수학자의 망가진 인생 추스린 '감동 방정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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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뷰티풀 마인드'는 픽션이다. 영화 개봉과 함께 재출간된 동명의 책과 비교해볼 때 영화적 과장이 물씬 풍긴다.
그러나 뼈대는 논픽션이다.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천재적 수학자 존 내시(1928~)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다큐멘터리적 구성을 따라가면서도 영화의 극적 장치인 미스터리와 반전을 능숙하게 덧붙이며 관심도를 배가시켰다.
흔히 사연깨나 있는 사람들은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몇 권이 될 것이다"고 말하곤 한다. 내시가 바로 그런 인물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20대부터 '제2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며 천재성을 보였던 내시(러셀 크로)가 중증의 정신분열로 시달리다가 다시 '정상적' 생활로 돌아오는 과정을 시쳇말로 '찡하게' 그려낸다.
천재와 광기는 흔히 등가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천재의 광기는 창조성의 원천으로, 천재의 일탈은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위한 통과의례로 간주되기 일쑤다.
'뷰티풀 마인드'의 도입부도 그렇게 시작한다. 영화는 사교성이란 전혀 없고 오직 새로운 발상, 창의적 이론을 찾아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프린스턴 대학의 젊은 수학도를 클로즈업한다. "강의는 창조력을 죽인다"며 수업을 멀리 하고, 화려한 넥타이를 맨 동료를 향해 "네 값싼 넥타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해볼까"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 괴짜다.
하지만 내시는 인간적으로 '불구'다. 호탕한 성격의 기숙사 룸메이트 찰스(폴 베타니)를 제외하곤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다. 오죽하면 처음 만난 여자에게 "우리 액체를 교환하자"(성교를 의미)라며 당돌한 제안을 했다가 뺨을 맞을까.
'뷰티풀 마인드'는 완벽한 휴먼 드라마다. 괴퍅하고 내성적인 내시. 그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이 지나쳐 마침내 정신분열증에 빠져들고, 주위로부터도 소외되는 모습이 가슴 아프게 펼쳐진다. 여기에 론 하워드 감독은 1950년대 미국 사회를 지배했던 '반공산주의' 물결을 연결시킨다. 미 국방부가 군사암호 해독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내시를 비밀요원으로 채용한 것. 소련 첩보원들이 각종 신문과 잡지에 남겨 놓은 암호를 푸는 임무가 내시에게 떨어진다.
하지만 내시의 정신분열증은 깊어만 간다. 소련이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망상과 환청에 시달린다. 여자 앞에선 '젬병'과 다름없는 그가 어렵게 시작한 결혼 생활에도 위기가 닥친다.
영화는 내시의 정신적·육체적 방황,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투병기로 채워진다. 감동은 무덤덤한 사람의 손수건도 적실 정도다. 30여년간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내시의 곁을 지키며 남편의 회생을 위해 헌신하는 아내 알리샤(제니퍼 코넬리)의 노력이 눈물로 다가서기 때문이다.
'뷰티풀 마인드' 는 이같은 감상적 구성에도 값싼 최루물로 빠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세상만사를 논리로 풀어가려는 내시의 이성과 그런 편협한 남편을 애정으로 감싸안는 알리샤의 감성이 충돌하고, 순수 이성의 대표적 학문으로 분류되는 수학과 이를 이용해 국가 이익을 도모하는 정치가 맞물린다.
특히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빚어내는 드라마의 힘이 강력한 데다 이를 신비스럽게 풀어가는 연출력도 탁월하다.
예컨대 내시가 언제부터 정신분열에 시달렸는지, 또 그가 경험하는 것들이 과연 현실인지,아니면 몽상인지 등이 안개 속처럼 모호해 미스터리 스릴러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런데 영화의 핵심축인 부부관계에 대한 묘사는 평면적이다. 이들 부부의 인간적 고충과 갈등이 상식적 수준에 그쳐 삶의 바닥을 뒤흔들기에는 다소 역부족으로 보인다.
러셀 크로의 연기는 압권이다. 내시의 50여년을 매혹적으로 소화했다. 눈빛 하나, 몸짓 하나에서도 불우한 천재의 내면이 감지된다.
지난해 '글래디에이터'에 이어 올 아카데미에서도 남우주연상 수상이 유력하다는 외신이 과장은 아닌 것 같다. 평소 수학을 어렵게만 여겨온 사람들에게 수학이 얼마나 인간적인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 하나로도 그의 존재는 빛이 난다. 22일 개봉. 12세 관람가.
박정호 기자

|Note
영화를 보면 책을 읽고 싶어진다. 7백50여쪽의 분량이 부담스럽다면 존 내시가 노벨상 시상식에서 밝힌 인생 고백을 들어보라(www.nobel.se/economics/laureates/1994/nash-autobio.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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