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제2부 薔薇戰爭 제1장 序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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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마조선사.
중국의 선종 사상 가장 뛰어나 천하의 모든 사람을 짓밟아 죽였던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709~788).
일찍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 좌선을 하고 있던 마조를 깨우치기 위해서 스승 회양(懷讓)은 앉아있는 마조 곁에서 기왓장을 하나 주워 갈아대기 시작한다.이에 마조가 스승에게 묻는다.
"기왓장을 갈아서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스승 회양이 대답하였다.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까 하네."
"그런다고 기왓장이 거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승이 일갈하여 소리쳤다.
"기왓장이 거울이 될 수 없듯이 좌선만으로는 부처가 될 수 없다.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만약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대는 수레를 다그쳐야 하겠는가,아니면 소를 다그쳐야 하겠는가."
스승의 이 말에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할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달았던 마조는 평생 동안 '평상심이야말로 도(平常心是道)'라고 가르쳤는데,당시 장안에는 마조의 제자 가운데 한사람인 여만이 살아있었던 것이었다.
여만을 통해 교종에서 선종으로 눈을 돌린 낭혜는 다시 마조의 제자였던 마곡보철(麻谷寶徹)화상을 찾아가는데,이 때의 행적을 역시 최치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곳을 떠나 마곡보철화상을 찾아가 모시면서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남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쉽게 해내었다.이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선문에 있어서 유검루(庾黔婁)와 같은 남다른 행실을 하는 자'라고 칭송하였다."
유검루는 양서(梁書)에 나오는 효성으로 유명한 인물로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을 한 효자였는데,마곡보철의 문도들은 스승을 극진히 모시며 수행에 전념하였던 낭혜를 유검루에 빗대어 칭찬하였던 것이다.그러나 스승이 죽자 다시 낭혜는 유랑을 떠난다.이 때의 행적 역시 최치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곳에 머무른 지 얼마 안되어 보철화상이 세상을 떠나자 검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이내 '큰 배가 떠나버렸는데 작은 배가 어디에 묶여있을 것인가'라고 말하고 이때부터 각지를 유랑하였는데,바람처럼 하여 그 기세를 막을 수 없었고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강을 지나고 산을 오르기까지 오래된 불교의 자취는 반드시 찾아가고 참된 고승은 반드시 만나보았다.머무르는 곳은 인가를 멀리하였는데 그것은 위태로운 마음을 편히 여기고,고생을 달게 여기며,몸은 종처럼 부리되 마음은 임금처럼 받들기 위해서였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오로지 병든 사람을 돌보고 고아와 자식이 없는 늙은이들을 도와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처럼 여겼다. 지독한 추위와 더위가 닥쳐 열이 나고,가슴이 답답하거나 손이 트고,얼음이 박히더라도 전혀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그 이름을 듣는 사람은 멀리서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를 표하여 동방의 대보살(大菩薩)이라고 크게 떠받들었다."
그러니까 낭혜가 장보고가 세운 신라인들의 사찰인 적산법화원으로 온 것은 스승 보철이 입적하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보시행(普施行)을 펼치던 바로 그 무렵이었던 것이다.
이때 낭혜는 스승이 돌아가신 후부터 머리에 검은 수건을 두르고 있어 일반 신도들은 그를 다만 흑건(黑巾)스님이라고만 부르고 있었다.
원래 적산법화원에서는 '여름에는 금광명경을 강의한다'고 엔닌은 기록하고 있지만 낭혜화상은 적산원에 주석하고 있는 동안 금광명경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강설하지 않았다.
원래 금광명경은 부처님의 수명이 한량없음을 찬탄하는 게송으로 예부터 나라를 수호하는 경전으로 존숭되어 왔는데, 장보고를 비롯하여 수십명의 신라인들이 강회를 청하고 교리경문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논의(論義)가 질문을 해도 다만 침묵으로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다만 낭혜화상은 모인 신도를 함께 데리고 나가서 풀을 베거나 장마로 무너진 다리를 새로 놓거나 하는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일을 하는 울력을 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강설을 대신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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