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정치인들 어디 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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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오해와 갈등을 이해와 화합으로 바꾸는 것이 정치다. 사람들이 멀리 보려 하지 않고 가까운 것에 집착할 때, 그래서 반목과 대립이 곳곳에서 기승을 부릴 때 정치는 바쁘게 움직이며 막힌 곳을 뚫고 묶인 매듭을 풀어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정치가 없다. 불신과 좌절을 깊게 하는 비방과 매도는 흔해도, 머리를 맞대고 믿음과 희망을 열어가는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너나없이 나라 걱정을 하는 정치과잉의 사회에서 정작 제대로 작동되는 정치는 없고, 정국이 어지러워도 귀기울여 지혜를 구할 원로 정치인 한 사람 없다. 무엇이 잘못돼 이렇게 정치가 무력할까.
여러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잘못은 정치구조를 왜곡시킨 군사독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력을 독점한 독재자는 헌정을 유린하면서 정치를 자기 뜻대로 재단하기 위해 직업 정치인들을 국정의 핵심에서 밀어냈다. 그러면서 정치는 누가 해도 되는 일처럼 격하시켰다. 인생의 대부분을 군인이나, 관료나, 기자나, 교수나, 배우로 지낸 사람들도 들어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정치인 것처럼 가장했다.
그러나 정치의 본질은 오히려 그 반대다. 정치는 다른 어느 분야보다 뛰어난 자질과 소양, 그리고 자기연마가 있어야 하는 전문 직종이다. 게다가 선거라는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민주국가라면 직업 정치인에게 정치를 맡길 수밖에 없다. 그들만이 상충하고 대립하는 견해와 이해관계를 실질적으로 조정하는 자질과 권한을 가지고 있고, 또 선거라는 방법을 통해 그 잘잘못의 책임이 판명되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정치부재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군사정권 시절 밀려난 직업 정치인은 아직도 제 구실을 못하고 있고 그 대신 언론과 관료집단이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언론은 지금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이다. 언론이 읽고 해석하는 정치가 현실 정치의 가이드라인이 되는 상황에서 직업 정치인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관료집단이 주요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현상도 여전하다. 직업 정치인이 아닌 관료들이 장·차관 자리와 대통령 비서실을 장악하고 여야 정당의 요직에도 포진하고 있다. 직업 정치인이 관료집단을 지휘하는 외국과는 반대로 우리는 관료들이 오히려 직업 정치인의 자리로 역류하고 있다.
언론이나 관료집단이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최근에는 시민단체와 노동자그룹의 힘도 가세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이 선출한 직업 정치인들이 실질적으로는 다른 세력들에게 정치의 주도권을 내주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정상적인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이젠 다시 직업 정치인에게 정치의 주도권과 책임을 돌려줘야 할 때가 됐다. 물론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고 시간도 걸릴 것이다. 이미 어긋나 있는 사회 세력간의 불균형을 인위적으로 교정할 힘이나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직업 정치인들의 실질적 역량을 보강해 그들이 실지(失地)를 찾아 나가도록 할 방법은 있다. 그것은 정치자금 지원이다. 우리는 그동안 정치에 많은 돈이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조달하는가에 대해선 외면하고 침묵해 왔다.
이제는 그 침묵을 깨고 정직해질 때가 됐다. 비겁한 목적의 정치자금이 아니라, 정치에 일생을 건 직업 정치인이 자기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면서 떳떳하게 활동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은 사회가 뒷받침해야 한다. 그 자금의 상당부분은 민주주의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경비로 우리 모두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지원의 대상은, 오히려 정치의 퇴행을 가져올 정당이나 정당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마땅히 청렴하고 유능한 직업 정치인 개인이 돼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일반인도 할 수 있지만 기업들의 역할이 크다. 훌륭한 직업 정치인들을 골라 투명하게 도와주는 일은 성공한 기업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보람이고 특권이다. 다행히도 이젠 각 정치인의 성향과 활약상이 가감없이 밝혀지고 있어 지원 대상을 고르기가 수월해졌다. 짜증내고 비난한다고 달라지는 정치는 없다. 그러나 올바른 직업 정치인을 찾아 투자하면 우리의 정치는 정녕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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