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프랑스 망명설 묻자 “제가 왜 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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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이 4일 오전 마카오 시내 알티라 호텔 10층의 식당 앞에서 기자와 만난 뒤 승강기에 타고있다.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하던 정남은 헤어질 땐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기자에게 인사했다. [마카오=신인섭 기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남(39)이 프랑스 망명을 준비 중이며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의 한 소식통은 최근 “김 위원장을 치료했고 정남도 치료했던 프랑스 국적 의사와 경제인 등 두 명을 통해 프랑스 관계기관과 협상을 마무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남도 “에펠탑을 보고 싶다”는 말을 현지의 지인에게 한 것으로 포착되기도 했다. 망명 이유는 이복동생 김정은의 끊임없는 위협 때문이다.

망명설을 확인하기 위해 김정남의 행적 수소문에 나선 것은 두 달 전. 그러나 그의 동선이 워낙 은밀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현지 교민에 따르면 방코델타아시아(BDA) 사건 이후 북한 관계자들이 모두 인근의 중국 지역으로 이동했고 더불어 1년 전쯤부터 정남의 움직임이 교포 사회에서 거의 포착되지 않았다.

첩보전에 가까운 과정을 거쳐 4일 오전 10시30분 마카오 알티라 호텔에서 정남을 만났다. 그는 망명설에 대해 “그럴 계획 없다”며 부인했다.

그를 만난 곳은 코타이 소재 38층 규모 호텔 10층의 오로라 양식당 안쪽.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남녀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남성이 입구로 들어서는 기자를 봤다. 그러더니 앞의 여성에게 뭔가 말한다. 흰색 블라우스에 푸른색 카디건, 바지 차림의 1m70㎝쯤 되는 20대 여성이 일어서더니 훌쩍 나갔다. 남아 있는 남성. 면도하지 않은 텁수룩한 얼굴이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김정남이었다. 그는 빠져 나가려 했지만 엘리베이터 앞의 취재팀에 막혔다. 그래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기자시죠?”라고 물어왔다. 취재진이 “사진 몇 장 찍겠다”고 하자 그러라며 시원시원하게 나왔다.

중앙SUNDAY 6월 6일자 1면.

서울에서 온 중앙일보의 일요신문 중앙SUNDAY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자 “ 남쪽 기자는 처음 만납니다. 지금까지 일본 기자는 좀 만났지만…”이라고 했다. 인사말을 한 뒤 막 바로 준비한 질문을 던졌다.

-아우님(김정일 위원장의 3남이자 후계자인 김정은)이 김옥 여사의 아드님이라고 말하셨다는 얘기를 마카오에서 들었습니다.

“(얼굴이 딱딱해졌다) 뭔 얘기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김정은(28)은 위원장의 두 번째 부인 고영희(사망)의 아들로 알려져 있었다. ‘김옥 여사’는 ‘김정일의 세 번째 여성으로 권력 실세’로 꼽히는 인물이다. 마카오의 지인들은 김정남이 ‘김정은이 고영희의 아들이 아니라 김옥의 아들’이라는 얘기를 했다고 전해 줬다. 서울의 고위 정보 소식통도 “이런 사실은 북쪽 지도부에서도 제한된 사람들만 안다”며 “이게 널리 알려지면 김정은이 김씨 가문의 혈통을 정통으로 계승하지 못한 인물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후계 구도가 뒤틀릴 수 있는 왕가 혈통의 비밀인 셈이다.

이어 ‘프랑스 망명설’로 옮겼다.

-유럽으로 가실 거란 얘기가 들리던데요.

“무슨 의미죠? 제가 왜 유럽 쪽으로 가죠?” “아이고…. 전혀. 유럽 쪽으로 갈 계획이 없습니다. 유럽 쪽으로 제가 왜 가요. 여행을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호텔에 한국 여성과 함께 들어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예?”라며 놀라는 듯하다. 이 여성은 마카오 카지노에서 딜러를 했고 이름은 신디며 현재 서울에서 산다고 한다.

대화를 다시 망명으로 틀었다.

-프랑스로 간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프랑스는 제가 아시다시피 과거 여행을 했지 않습니까. 프랑스로 갈 이유가 없죠.”

-오전에 아드님을 만났습니다(그의 아들, 즉 김 위원장의 손자 15세 한솔군을 이날 등굣길에서 만났다 ).

“가족 프라이버시는 지켜주시죠.”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를 막으며 물었다.

-아버님의 건강은 어떠세요.

“좋으십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는 … .

“천안함? 나는 모릅니다. 그만하시죠.” 10분 인터뷰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호텔 직원이 취재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김정남 찾기를 위해 1차로 중앙일보의 토요섹션인 ‘사람섹션 J’(5월 8일자)의 박현영 기자가 먼저 마카오를 훑었다. 얼마 뒤 기자의 마카오 지인들은 “김정남이 곧 중국에서 돌아온다”고 했다. 첩보에 따라 3일 마카오 국제공항에서 종일 대기했지만 허탕. 낙담하고 있는데 4일 오후 현지 여행사 사장이 한마디 전해 줬다. “알티라호텔에 한국 여자와 있는 걸 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호텔은 고객 프라이버시를 최대로 존중하게 설계돼 쉽지 않았다. 보통 1층 로비에서 내왕자를 찾는데 이 호텔엔 특이하게 38층에 로비가 있다. 그것도 지름 20m 정도의 좁은 공간. 빠져나가는 길도 너무 많았다. 다시 낙담. 순간 ‘늦은 아침을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10층 식당. 마침내 거기 있었다. 일본 언론만 해냈고 한국 언론은 한 번도 못했던 ‘김정남 찾기’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홍콩·마카오=안성규 기자 (중앙SUNDAY 외교·안보 에디터)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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