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제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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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가 정책 실패를 반복하고 권력남용과 불법을 저질러 도저히 국정을 올바로 운영할 능력이 없다고 보일 때 취할 수 있는 조치가 무엇일까. 이럴 때 내각책임제에서는 국회에서 내각을 불신임해 정부를 중도 하차시키고 새 정부를 다시 구성한다.
대통령제에서는 이런 내각불신임의 장치가 없기 때문에 야당이나 여론이 정부에 제대로 하라고 최선을 다해 지적하다 그래도 정부가 다른 길로 계속 가면 범국민적으로 저항권을 행사해 정부를 바꾸는 길밖에 없다. 국민에게 온갖 위험이 따르는 저항을 요구하기보다 불신임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내각제를 취할 때 얻는 이점의 하나다.
이런 점에서 내각제 개헌론이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한국 대통령제가 독재, 권위주의 통치, 제왕적 대통령 등으로 평가되고 있듯이 대통령이 선출된 군주로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전횡해 국민을 고통의 늪으로 빠뜨린 것은 단연 대통령제의 실패와 비극을 의미한다. 이런 비극의 한국 대통령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아예 막강한 대통령을 두지 않는 내각제의 길을 찾는 것은 손쉬운 생각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까지의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제 정부형태가 실패한 것이 내각제의 총리 대신에 대통령이 존재했다는 사실 때문일까. 국가의 모든 시스템과 국정운영이 정상적이었는데 대통령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국민이 고통스러웠을까.
온전하고 바른 대통령제의 나라는 이렇다. 국가권력은 국회·행정부·사법부로 나뉘고, 각기 어느 기관의 지배도 받음이 없이 공정하게 권한을 행사하며, 권력남용에 대비해 서로간에 견제를 한다. 대통령은 국회나 사법부와 철저하게 분리돼 권력통합이 생기지 않는다. 대통령이 위법행위를 했을 때는 탄핵돼 쫓겨난다. 국가정보기관은 오로지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음지에서 일하고, 검찰은 어떤 기관의 간섭도 받음이 없이 정의의 칼을 들고 사회악과 싸운다. 국세청은 공평하고 공정한 과세로 안정적인 재정을 유지하고 세무조사로 국민을 탄압하지 않는다. 사법부는 정치권의 영향을 받음이 없이 언제나 공명정대하게 재판한다. 언론은 국가의 잘못을 항시 감시하며, 어떤 경우에도 국가권력이 언론을 탄압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에서 국민들은 헌법에 정해진 자유와 권리를 향유하며 마음놓고 생업에 종사한다. 지금 우리 국민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늪에서 보면, 이것은 어느 낙원을 그린 그림같은 풍경으로 보일지 모르나 현재 우리 헌법이 정하고 있는 대통령제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이렇다. 집권세력의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추종자로 돼 있고, 공천권과 연고주의로 대통령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 검찰 인사에 대통령이 사사건건 개입해 검찰이 정권 유지의 도구로 변질돼 권력형 부정과 비리사건이 어느 하나 속시원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집권세력은 국세청을 장악해 세무조사를 언론이나 비판세력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기업인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집권세력을 감시해야 할 정보기관이 집권세력의 의중대로 동원된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가 아니고 정당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있다. 자유투표를 하면 반란표로 몰리고 공천에서 탈락되는 보복을 당한다. 모든 권력은 대통령 1인에게 집중돼 있다. '국민을 위한 국민의 나라'가 아니라, '대통령을 위한, 대통령의 나라'다. 이것이 제왕적 대통령제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실패했고, 그 고통을 국민이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이 땅의 대통령제의 비극이다. 언제나 최선인 정부형태는 없다. 내각제도 총리독재와 재벌이 국가를 장악하는 우를 초래할 수 있다. 이원정부제는 집행부의 수장이 둘이어서 머리가 둘인 뱀의 운명을 불러올 수도 있다. 정부형태의 변경은 우리 사회의 변화에 따라 장기적 전망을 갖고 신중하게 논의할 필요는 있지만 우선 '그림 같은'현재 있는 헌법대로라도 대통령제를 운영하면 많은 것이 해결된다. 손쉬운 길을 놔두고 판을 뒤엎는 길만 찾는데는 분명 불순한 의도가 있게 마련이다.| ◇필자약력=서울대 법대 졸업, 제24회 사법시험합격,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건국대 교수 역임. 법학박사(연세대). 미국 하버드대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헌법학과 국가개혁 연구. 저서 『헌법연구』3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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