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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기형아’는 오해, 모든 약이 위험하진 않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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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호 15면

#1 “임신인 줄 모르고 구충제를 먹었어요. 임신 기간에 구충제는 금기라던데, 임신중절수술을 해야 하나요?” 주부 권은영(가명·33·대구)씨는 지난 5월 임신 사실을 알고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4월 마지막 주쯤에 별생각 없이 구충제를 먹은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구충제 때문에 태아가 잘못될까 걱정한 권씨는 낙태까지 생각하게 됐다. 권 씨는 이전에도 임신인 줄 모르고 치료약을 먹었다가 낙태를 한 적이 있다.

임신 때 약 복용하고 낙태 고민하는 예비 엄마들

#2 서울 도봉구에 사는 최수아(34)씨는 지난달 그토록 원하던 둘째를 임신했다. 첫째를 불임치료로 어렵게 얻었던 터라 임신 소식이 더 반갑고 기뻤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임신 2주차에 건강검진을 받은 일 때문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흉부엑스레이와 맘모그라피를 촬영하면서 방사선에 두 번 노출됐던 것. 병원에 문의한 결과, ‘괜찮다’는 말을 들었지만 왠지 찜찜하다.

기혼여성 9.6%가 약물복용 이유로 낙태
아기를 낳는 순간, 산모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손가락 발가락 모두 다섯 개씩 맞아요?”라고 한다. 아들인지 딸인지 보다 아기의 기형 여부에 더 관심이 많다는 의미다. 한국마더세이프 상담센터 한정렬(관동의대 제일병원 교수) 센터장은 “건강한 아기를 출산하기 위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요인을 그대로 갖고 임신하면 자연유산·기형발생·저체중증·정신지체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우리나라는 계획 임신율이 50% 수준으로, 임신인 줄 모르고 지내다가 기형아 출산에 대한 걱정으로 낙태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 약물을 복용했다가 기형아 출산을 걱정해 임신중절을 선택한 경우가 연간 9만6000건에 이른다.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생식발생 독성 정보활용화 방안 연구 자료에 따르면 1999~2008년 사이에 임신한 미혼여성의 12.6%, 기혼여성의 9.6%가 임신 중 약물복용을 이유로 낙태를 선택했다. 대부분 소화제나 감기약·두통약·항히스타민제 등을 복용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임신 중 약물 노출에 대한 상담을 하고 있는 한국마더세이프 상담센터에도 하루 평균 23명의 임산부가 ‘임신인지 모르고 약·술·흡연·방사선에 노출됐는데 괜찮은지’ 등을 문의하고 있다.

임신 중에 약을 먹었다고 무조건 위험한 것은 아니다. 태아기형학회의 분류에 따르면 약물 가운데 3% 정도만이 기형아 발생 위험이 있는 것으로 보고됐다. 임신부가 주의해야 할 약은 간질약(페니토인·페노바비탈·카바마제핀), 고혈압약(레니텍), 항생제(카나마이신), 여드름 치료약(아쿠탄) 정도다. 이들 약도 노출시기에 따라 태아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진다. 한 센터장은 “태아 기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시기는 임신 5~10주 사이의 기관 형성기”라면서 “이때는 외부 위험물질에 대한 노출을 삼가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천식이나 간질·정신과질환·당뇨병 등으로 계속적인 약물 노출이 불가피한 경우에도 전문의와 상담을 통해 약의 종류와 용량을 조절하면 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약 설명서에서 ‘임신부 주의’를 표시하는 이유가 뭘까. 신약이 개발돼 임상시험을 거쳐 일반에 판매되기까지 임신부를 대상으로 약의 안전성을 따로 평가하지 않는다. 태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제약회사는 임신부가 약을 복용해 기형이 발생했다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그 같은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임신 중 건강검진으로 인한 방사선 노출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강남세브란스병원 방사선종양학과 이익재 교수는 “방사선은 DNA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많이 노출되면 세포 분화의 흐름이 깨질 수 있지만, 치료 목적의 방사선보다 선량이 크지 않은 진단용 X레이나 CT(컴퓨터단층촬영)는 괜찮다”고 말했다. 카페인이 든 커피는 하루 한 잔 정도까지는 괜찮으나 되도록이면 카페인이 없는 커피를 마신다.

반면 많은 임신부가 ‘한 잔쯤은 괜찮겠지’하고 쉽게 생각하는 술은 주의가 필요하다. 한정렬 센터장은 “임신부가 마시는 술은 여과 없이 태반을 통과해 아기에게 전달된다”면서 “미성숙한 태아는 알코올을 대사해 배설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알코올이 엄마보다 더 높은 농도로 오래 지속된다”고 했다. 알코올과 그 대사물인 아세트알데하이드는 뇌세포에 직접 영향을 준다. 탯줄의 혈관을 수축시켜 태아의 뇌나 다른 장기세포의 발달에 필요한 산소와 영양 공급을 방해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매년 8000여 명의 태아알코올증후군 아기가 태어나는데, 이는 정신지체·성장장애·안면기형을 갖는다.

각종 위험 줄이려면 계획 세워 아이 갖길
태아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예상치 못 한 임신일 경우가 훨씬 크다. 한양대병원 산부인과 박문일(한국모자보건학회장) 교수는 “계획 없이 가진 아기는 건강의 질이 떨어진다”면서 “현대여성이라면 ‘나 다음 달에 임신할 거야’ 식의 임신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계획임신을 하면 임신 초기 기형유발물질에 대한 노출을 2~3배가량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상체중의 건강한 아기를 낳을 가능성이 커진다. 한정렬 센터장은 “임신하기 최소 한 달 전부터는 하루 400㎍의 엽산을 복용하면 무뇌아와 신경관결손증 등의 기형을 예방할 수 있다”면서 “혹시 자궁 외 임신이 되더라도 계획임신인 경우에는 태아의 심장이 뛰기 전 조기에 발견해 수술이 아닌 약물만으로도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당뇨병이나 간질처럼 만성질환이 있는 경우도 임신을 미리 계획하면 태아기형의 위험성이 있는 약물을 최소한으로 해 기형아 발생 위험률을 낮출 수 있다.

건강한 아기를 원한다면 건강한 아기를 만들 준비를 해야 한다. 박문일 교수는 “각종 바이러스나 균에 대한 면역력 없이 임신한다는 것은 자신과 태아의 건강에 무책임한 일”이라면서 임신 전 검사와 예방접종을 강조했다. 예컨대 임신 초기에 풍진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유산될 확률이 매우 높으며 선천성 심장질환·백내장·풍진증후군을 가진 아기가 태어날 수 있다. 이를 예방하는 MMR백신은 임신 중에는 맞을 수 없고 임신 전 3~6개월 전에 접종해야 한다.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라면 최소 3개월 전에는 산부인과를 방문해 검진을 받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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