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귀를 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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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권력은(무슨 권력이든) 있을 때 행사하는 걸 삼가야 하는 것./정말 힘 있는 존재는 그게 저절로 된다는 것./그게 스스로 안되면 그건 힘이 없다는 증거./권력은 그 행사를 삼갈 때 힘차고, 그 삼가는 게 저절로 그렇게 될 때 그건 아름다운 것./빛나고 아름다운 것."(정현종 '권력', 문학과사회 2001년 겨울호)
시인이 권력을 논하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시인이 권력을 이처럼 간결하게, 그것도 한국의 정치풍토 속에서 그 속성과 지향점까지 절묘하게 제시한 것도 희한한 일이다. 우리 사회엔 온갖 권력이 널려 있다. 관권·언권·정권·여권…. 그중 대통령 권력이 가장 막강하니 제왕적 권력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권력이 행사하는 이벤트 중 하나가 각료 임면절차이니 개각에 대한 기대와 환멸이 부침하는 것이다. 지난 권력이 무엇을 잘못했고 남은 권력으로 어떻게 임기말을 마무리할 것인가. 이런 물음과 반성 속에서 권력 스스로 몸을 삼가고 몸을 낮추고 가다듬는 모습이 이번 개각에서 비춰지길 국민은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의 권력은 아직도 몸을 낮추지도, 삼가지도, 절제하지도 않는다. 권력의 길을 갈 뿐이다. 어디 개가 짖느냐는 오기와 독선이 우리 권력사의 임기말 증세다. 박정희 정권의 말기가 그러했고 전두환 정권의 신군부가 그러했다. 문민·국민 정부라면 이젠 기를 피고 살겠구나 했지만 이른바 신민주 개혁권력이 설치면서 국세청·검찰이 군부세력을 대신해 압제의 도구로 표변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편가르고 정의라는 명목으로 권력 반대편을 내몰아가는 개혁권력의 폭력도 있었다. 의료개혁·교육개혁·언론개혁이 개혁 폭력의 증거다. 이미 숱하게 잘못된 권력남용의 사유를 지적해 왔으니 또 다시 그 적폐를 따질 필요조차 없다.
그것이 개혁 남용이 아니었다 해도 좋다. 그러면 신권력은 정의와 순결의 사도였는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온갖 의혹사건과 무슨 게이트 수사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 부정의와 무절제한 권력 남용이 '물정권''불정권' 못지 않게 신권력 핵심에서 자행된 흔적이 들춰지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국민은 기다렸다. 이 정권의 권력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서는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좀더 기다려 보자. 지난 권력의 남용을 진솔하게 반성하고 새롭게 뭔가를 해보겠다는 의지표명과 권력 정비가 있겠지 하고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진솔한 반성도 없었고 권력의 모습을 정비해 뭔가 새로운 꿈을 실어보려는 의지마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개각을 왜 했느냐며 언론이 나서고 국민이 냉소를 짓는 것이다. 권력이 자제하고 몸을 낮추기는커녕 권력의 막강함을 스스로 과시하는, 그래서 권력 스스로 힘이 없고 무기력함을 국민 앞에 내보인 꼴이니 이번 개각으로 이 정권도 물건너갔다는 소리가 들린다.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듯./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할 때는 없는 듯./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듯…."(정현종 '경청', 문학과사회 같은 호)
김수환 추기경은 한 강연회에서 박정희 대통령 이후 모든 대통령을 만나봤지만 (엄청난 권위 때문에)그 앞에서 바른말 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최고 권력자가 남의 소리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의 종말이 비극적이었음을 성직자와 시인이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 권력에 귀를 달자. 경청하는 권력, 스스로 절제하는 권력, 귀가 달린 권력이 아름답고 힘있는 권력임을 국민은 다 아는데 권력자만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 권력사의 오점임을 우리는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군부권력자는 지시에만 익숙하다. 그러나 군부는 지도자의 머리가 비어 있어도 참모가 있고 상의와 하의가 통행하는 시스템이라는 최저 안전판이나마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권력에는 이런 장치마저 가동하지 않는 듯 오로지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린다. 권력자 혼자서 생각하고 말하고 지시할 때 그런 권력은 아름답지도 강하지도 않다. 그러나 절망하기엔 세월이 너무 많이 남았다. 누군가는 권력에 귀를 달겠지 하는 소망과 기대를 아직도 버리지 못한다. 그게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애국심이니까. 권력에 귀를 달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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