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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소비…깊어진 불황] 정책 불확실성…부자들 지갑 닫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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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해찬 국무총리는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정상적인 소비활동을 위축시키거나 왜곡시킬 수 있는 정책이나 법안은 시행 방법이나 시기를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또 "올 연말연시에는 미풍양속 차원의 선물 주고받기 운동을 펼치자"고 했다. 꼭 닫힌 국민의 지갑을 조금이나마 열어보겠다는 정부의 의지인 셈이다. 공직자들에게 연말에 선물을 받지 말라고 지시하던 기존의 정부 방침과는 영 딴판이다.

하지만 연말에 선물을 주고받는다고 얼어붙은 소비가 살아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난 8월 초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부자가 돈을 써야 경제가 돌아간다"며 '부자소비론'을 강조했다. 그러나 부자들은 여전히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 전무는 "부자가 돈지갑을 완전히 닫은 게 아니다. 이들은 해외에서는 지갑을 연다. 문제는 정책의 불확실성"이라고 말했다.

◆불확실성을 걷어라=정부는 올해만 해도 ▶특소세 폐지▶소득세율 인하▶건설경기 연착륙 방안 등 다양한 경기 부양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대책들이 먹히지 않는 것은 정책의 엇박자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종합부동산세 도입은 부동산 보유세를 현실화한다는 명분에도 부자들을 겨냥한 세금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세금이 뛸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돈을 쓰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주택거래신고지역 제도가 시행된 후 서울 강남.송파.강동구 등에서 부동산 거래 건수는 평소보다 70%나 줄었다.

정부가 재건축 아파트 개발이익환수제를 추진하자 재건축 조합들은 재건축을 포기하겠다고 아우성이다. 이런 부동산 정책이 투기를 막을지는 모르나 아파트 공급이 줄어 서민들의 내집마련은 더 어려워진다.

이 같은 엇박자는 건전한 접대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취지로 도입한 접대비 50만원 이상 실명제에서도 드러났다. 이 제도 등으로 인해 소비가 더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1가구 3주택 양도세 중과'를 놓고 정부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고 국민이 정부를 믿을 리 없다. 이런 불확실성은 곧 소비 침체로 이어진다.

성매매방지특별법은 잘못된 성문화를 바로잡자는 취지로 시행됐다. 그러나 한 교수는 "법의 명분은 좋으나 이 법이 시행됐을 때 불러올 경제적 파급효과를 고려해 세심한 보완책을 마련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한양대 나성린 교수는 "정부는 그동안 보일러를 틀겠다고 하면서 에어컨을 작동시키는 엇박자를 보여왔다"며 "이제는 본질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反)부자 정서도 없애야=천정배 열린우리당 대표는 지난 7월 "행정수도 이전 반대의 저변에는 수도권 부유층.상류층의 기득권 보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자들은 이런 발언에 위축될 수밖에 없다.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김모(43)사장은 올 여름휴가를 미국 서부로 다녀왔다. 골프를 두 차례 치고, 관광도 즐겼다. "돈은 더 들지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부담없이 지내고 싶었다"는 게 그의 심정이었다.

현재 소득세의 30% 이상을 연간 5억원 이상을 번 4000명의 부자가 낸다. 종합토지세를 100만원 이상 내는 17만명이 종합토지세 전체 세금의 70%를 부담한다.

부자학을 강의하는 서울여대 한동철(경영학)교수는 "부자들은 이만큼 경제에 기여하는데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부자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물의를 일으킨 졸부를 제외하고 열심히 노력해 돈을 번 부자들을 제대로 평가해야 이들이 지갑을 열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프리 존스 주한 미 상공회의소 명예회장은 "한국에서 (수익률) 10% 이상 올리면 범죄인 취급을 받는다. (정부는) 돈을 많이 버는 게 나쁜 것이 아님을 국민에게 인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정경민.김종윤.김동호.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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