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6월 개봉 '오아시스'에 빠진 이창동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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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머리가 텅 비있어요. 뭘 물어봐도 할 말이 없는데…."

이창동(49) 감독과 인터뷰 약속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몇 번의 고사(固辭) 끝에 마지못한 듯 응한 그는 현재 촬영 중인 '오아시스'(6월 개봉 예정)에 전념하느라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지낸다"고 했다.

"'초록 물고기'나 '박하 사탕' 만들 때보다 훨씬 힘들다"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창작통(創作痛)의 부스러기가 눈(雪)처럼 떨어져 내리는 것 같다.

하긴, 매번 다른 갱도를 통해 창조의 광물을 채집하려는 이에게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그 길은 얼마나 막막하고 속수무책일 것인가.

설경구.문소리 주연의 '오아시스'는 전작들과는 다른 색채를 띤다. 일산 신도시를 배경으로 해체돼가는 가족을 그린 '초록 물고기'(1996년)나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상흔을 건드렸던 '박하 사탕'(99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스토리로만 보면 '오아시스'는 좀 뜬금없어 보인다.

뺑소니 사고로 복역한 뒤 희망없이 떠도는 사내와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처녀가 지순한 사랑을 일궈간다는 러브 스토리.

"내용과 형식에서 내 영화의 문법을 '확' 바꾸고 싶었다. 특히 형식에 변형을 주고자 했다. 그래서 택한 게 영화 전체를 핸드 헬드로 찍는다는 것이었다.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시킨 채 찍는 게 아니라 카메라 기사가 어깨에 메고 전 장면을 촬영한다는 거다.

덴마크 감독 라스 폰 트리에가 '백치들' 같은 작품에 적용한 방식이다. 근데 그렇게 찍고 보니 화면이 어지럽고 산만해서 안 되겠더라. 할 수 없이 처음 네 번 찍은 필름을 미련없이 버렸다."

-그럼 '들고 찍기'방식은 포기했나.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를 들고 찍는다. 다만 상하좌우로의 움직임을 자제해 화면이 산만하지 않도록 할 생각이다. '들고 찍기'를 염두에 둔 건 가능하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미술이든 연극이든 영화든 프레임(구도)은 피사체의 일부만을 도려낸다. 액자나 창(窓)처럼 말이다. 그건 프레임 안에 미적 세계를 가두고 프레임 바깥의 현실을 무시한다. 카메라를 들고 찍으면 이런 미학적 한계를 흐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막상 해 보니 인물과 현실은 오간 데 없고 카메라 움직임만 두드러져 보였다. 그래서 다시 찍었는데 어지럽지 않으면서도 묘한 현실감(리얼리티)이 스크린에 묻어나는 것 같더라."

-전작에 비해 현실이 뒤로 물러나고 남녀간 사랑이 전면에 나오는데.

"러브 스토리야말로 현실을 이야기하기에 적합한 소재가 아닐까 싶다. 사랑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누추하고 남루한 현실에 떠 있는 팬터지(환상)다. 누구나 사랑을 할 때 만큼은 현실에서 증발한다.

그러다 사랑이 현실과 마찰을 일으킬 때, 즉 사랑과 현실이 부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삶(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니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현실을 가감없이 들여다보는 길잡이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보면 전작들에 비해 고민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남녀 주인공은 속된 의미에서 매력적이거나 아름답지 않아 관객이 동일시하기 힘든 인물인데.

"사랑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흔히 팬터지라고 한다. 여태껏 많은 영화들은 관객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려 했다. 특히 할리우드 식이 그렇다. 이들은 몸매와 용모가 뛰어난 스타를 기용하고 심지어 악당마저도 멋있고 매혹적으로 그린다.

이를 통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 현실을 망각시키는 이야기를 유포해 왔다. 이를 뒤집고 싶었다. 환상을 배제하고 가장 현실에 근접한 화면을 보여주었을 때 관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했다. 나로서는 모험을 하는 셈이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소지』『집념』 등으로 이감독은 80년대의 '문제적 소설가'에 속했다. 그러다 마흔이 다 된 나이로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연출부원으로 '박박 기면서' 영화에 뛰어들었다. 후회는 없나.

"영화 감독이 소설가보다 더 재미있다. 재능이 없어서인지 문학을 잘 접은 것 같다(웃음). 그러나 본질적으로 둘 사이엔 별 차이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문학에서 영화라는 그릇으로 옮긴 데 불과하다고 본다. 둘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차이라면 영화는 만드는 사람이 완성하고 문학은 보는 사람이 (자신의 상상력과 감성, 욕망 등을 통해) 완성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상을 만드는 사람은 더 조심해야 한다. 영상은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다가가기 때문에 잘못 휘두르면 파급력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올해 1월 1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에 이감독 기사가 짤막하게 실렸고 이달 말께 와이드 인터뷰 기사가 나온다고 들었다.

"'바람직한 세계화'의 방향을 묻는 특집 기사였는데 난 감독이라 '할리우드의 대용량 스피커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세계의 작은 목소리들에 서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요지로 답했다. 지금 세계는 시장의 논리가 모든 걸 지배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유럽에서는 이미 반성이 일고 있고 대안을 찾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은 무풍지대와 같다. 세계화는 미국화가 아닌데도 우리는 이를 동일시하는 것 같다. 예컨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CNN을 통해 리얼타임으로 시청하는 게 세계화가 아니다. 미국의 시각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인의 입장에서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게 세계화의 진정한 의미다."

이영기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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