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102) 추풍낙엽의 3군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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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사단의 방어 정면을 치고 들어왔다가 미군 2사단 지역으로 잘못 들어가 시간을 지체한 중공군 부대는 그 뒤에는 반드시 소규모 부대를 먼저 보내 한국군만을 찾아 공격을 가했다. 5사단은 경우에 따라 미군의 대포와 공중 폭격 등 화력 지원을 받으면서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나중에 중공군의 공격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미군 2사단이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5사단의 분전은 큰 힘으로 작용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중공군은 1951년 5월의 대규모 공세에서 점을 뚫는 전법으로 동부전선의 국군을 공략했다. 아군은 이로써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중공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국군들이 전선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국군 3군단은 절반 이상의 병력을 상실해 나중에 군단 자체가 해체됐다. [중국 해방군화보사]

문제는 3군단이었다. 3군단 병력은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된 지 하루 만인 5월 17일 심각한 공황상태에 빠져 들었다. 가장 중요한 후퇴로인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 이미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이 경우 3군단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두 가지다. 오마치 고개에 대해 총력전을 펼쳐 퇴로를 확보한 뒤 신속하게 철수하는 게 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나가서 다가오는 적의 대규모 군대를 향해 결사적으로 항전을 해야 했다. 3군단 지휘부는 오마치 고개에 대한 공격을 펼쳤다. 퇴로를 확보하려는 차원에서 벌인 작전이었다. 그러나 17일 야간에 시행한 이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병력이 흩어졌고, 지휘체계는 이미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대한 회고를 종합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실수가 드러난다. 우선 작전의 핵심이었던 9사단의 최석 사단장은 일선 지휘 경험이 거의 없던 군인이었다. 유재흥 군단장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행정을 주로 맡다가 ‘하루아침에 실전 지휘관 자리에 오른’ 경우다. 유일한 퇴로가 적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그렇게 실전 경험이 없던 지휘관이 작전을 지휘한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유재흥 군단장은 먼저 현리로 떠났다. 현장을 떠나면서 유 군단장은 9사단과 3사단이 협조해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먼저 3사단이 현리 북쪽에서 방어를 하면서 9사단이 공격에 나서도록 했다. 그 뒤 9사단의 공격이 성공할 경우 3사단은 지체 없이 빠져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결과는 허무했다. 18일 군단에 전해진 소식은 “오마치 고개 공격은 실시해 보기도 전에 병력이 분산됐으며 일부 병력은 이미 방대산 쪽으로 빠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연대장급 지휘관으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또 다른 증언에 따르면 당시 오마치 고개를 공격하는 대열에는 사단장 등 고급 지휘관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눈에 띄는 장면은 “(후퇴하는) 9사단과 3사단 병력이 이리저리 뒤섞여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회고는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전 부대는 질서가 무너져 여기저기를 밀려다녔다. 냇가(창촌강)에 당도해 보니 옷을 입고 건너는 자, 벗고 건너는 자가 수없이 많았으며, 적이 강 건너편에서 집중 사격을 가하여 많은 장병이 희생당했다….”

3군단은 중공군이 점령한 오마치 고개를 피해 방대산의 험한 숲길을 헤치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무기를 제대로 지니고 있는 장병이 많지 않았다고 했다.

강영훈(1922~) * 1959년 6군단장 부임 당시.

강영훈 장군은 당시 3군단 부군단장이었다. 유재흥 군단장의 기억에 따르면 강 장군은 부군단장으로서 후퇴하는 장병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강 준장은 군단장과 교대로 흩어져 내려오는 각 사단을 찾아 다니면서 병력을 수습하기에 힘쓰는 한편으로 직접 군단 연락기에 올라타고서 전장을 날아다녔다고 한다. 비행기 아래에 마이크를 설치해 “군단 장병은 모두 하진부리로 집결하라”고 방송을 거듭해 낙오병을 최소한도로 줄이려고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컸다. 이리저리 흩어져 내려오는 병력은 중공군 사격의 희생양이 됐고, 군단이 보유했던 수많은 장비와 무기들이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오마치 고개를 선점한 적군에 의해 포위되자 이들은 우선 수류탄을 야포의 포신에 넣고 터뜨려 못쓰게 했고, 트럭과 다른 장비들도 불태웠다. 그렇지만, 시간은 짧았고 쳐들어오는 적의 기세는 강했다. 미처 파괴하지 못한 숱한 장비는 적의 화력과 장비를 보태는 데 도움이 되고 말았다.

미 10군단에 배속된 국군 7사단이 먼저 중공군의 공격에 무너졌던 사실은 인접한 3군단 각 부대에 제때 알려지지 않았다. 16일 오후 4시쯤 적군이 밀고 들어왔고, 인접부대의 철수 명령은 다음 날 아침에야 떨어졌다. 왜 그런 지체현상이 벌어졌는지는 지금도 자세히 알 수 없다. 그저 3군단은 거세게 휘몰아치는 가을바람에 맥없이 흩날리는 낙엽처럼 무너지고 흩어져 갔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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