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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3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검사의 길

24. 젊은 공안검사의 시작

서울지검 공안부장 시절에도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특히 공안부를 맡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K검사가 갑자기 사표를 내는 바람에 나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 들었다.

그 당시 학생들의 지하서클 활동이 문제가 된 공안사건이 많았다. K검사가 연세대 지하 써클 사건을 맡았다.

학생 몇 명이 북한 방송을 몰래 듣고 이를 노트에 기록, 학습과 토론을 하면서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찬양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 대통령이 평양을 다녀오고 TV 등에서 북한 실상이 공개적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중대한 공안 사건이었다. 대학가에서 불온한 좌익 성향의 학생들 사이에 자생적 공산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엄격히 대처하고 있었다.

1981년 5월 어느 날 K검사가 나에게 오더니 "이 사건을 기소하기 곤란하니 다른 검사에게 넘겨 달라"고 건의했다.

이유를 물어도 특별한 설명이 없었다.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러한 사안으로 한창 커가는 대학생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당황했다. 아직 상부에 보고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다른 부원들에게 K검사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 검사는 감상적일 때가 더러 있다는 이야기였다. 자주 점심을 같이 하고 덕수궁을 산책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로 그를 설득했다.

"우리의 상황이 젊은 학생들에게 동정적이거나 감상적으로 대하기에는 너무나 각박하고 체제 수호에 앞장서야 할 공안 검사가 나약해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 검사도 내 의견에 동의하고 "부장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대답해 나는 안심했다.

그 사건의 구속 만기일에 결재가 올라왔다. 그런데 두꺼운 기록 뭉치 사이에 공소장은 없고 K검사의 사직서 봉투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 우려하던 일이 터졌구나"라는 생각에 K검사를 찾았으나 벌써 퇴근한 뒤였다. 전 부원들을 긴급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들이었다.

K검사를 충분히 납득시켰다고 믿었던 것이 불찰이었다고 나는 후회했다. 어쨌든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김석휘(金錫輝) 검사장에게 보고했다. 金검사장도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부하 검사 한명을 데리고 잠실 주공아파트 K검사의 집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K검사의 부인도 남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연락이 오면 나에게 연결이 되도록 해달라고 부인에게 부탁을 한 뒤 밤늦은 시간 청으로 들어갔다. 金검사장도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정형근(鄭亨根.현 국회의원) 검사에게 사건을 재배당한 뒤 공소장을 만들어 기소하고 나머지는 그 후에 대처하기로 했다. 鄭검사는 기록을 검토할 시간이 없어 수사 기록에 있는 의견서를 그대로 옮기다시피해 밤 12가 거의 다되어 법원에 공소장을 접수시킬 수 있었다.

그날 밤 공안부 검사 전원이 퇴근도 하지 않고 비상 대기했다. 공안부장으로 오면서 부원들의 개성과 성향에 대해 충분히 검토했는 데도 이같은 사태가 생겨 나는 심한 자책감을 느꼈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그 검사의 태도나 정신적 변화에 대해 수수께끼로 생각하고 있다. 또 아까운 검사 한명이 검찰을 떠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사태가 더 커지는 것을 막기위해 보안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 관련 공안기관이나 언론에 공안검사가 사건 처리 도중 사표를 낸 사실이 알려지면 파문이 것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공안부의 보안은 철통같았다. 상당한 기간이 지난 다음에야 K검사의 사표가 수리된 사실이 알려졌지만 그가 왜 검사직을 그만두었는 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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