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3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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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검사의 길

23. 반미성명 사건

필자가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재직하던 1981년 4월 15일 한국교회사회 선교협의회가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반미성명서를 발표했다.

공안부 검사들이 성명서 내용을 검토한 결과 '북침준비 완료','반미투쟁''남북분단의 책임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등 북한 공산집단과 동일한 주장을 하면서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을 정당시하는 내용등은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에따라 성명서 작성과 채택.발표에 관여한 종교계 인사 11명을 같은 달 21일부터 소환조사했다.

필자는 같은 달 23일 공안부 검사들이 배석한 가운데 다음과 같은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한미간의 관계를 이간(離間)하고 폭력.사회교란을 획책하는 북한공산집단의 선전활동에 동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우리의 안보현실에 비추어 용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소환조사를 받은 일부 인사의 행위는 명백한 범법행위로 판단된다.

소환 조사를 받은 인사 대부분은 70년대 반체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몇몇 주동자에 의해 작성된 성명서 내용이 국가사회에 미칠 중대성을 깨닫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또 이들은 비등한 국민적 비판여론이 본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돼 앞으로 이러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확실히 했다. 검찰은 이런 점과 국민화합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음에 비추어 이번만은 엄중히 범법행위를 경고하고 형사문책만은 유보하기로 하고 조사를 일단 마무리한다.'

이 사건 조사는 불과 만 이틀이 걸렸을 만큼 극히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 졌다. 서울지검 공안부 소속 검사 5명과 대검연구관 김상수(金相洙.전 서울고검장), 조준웅(趙俊雄.전 인천지검장)검사, 남부지청에서 지원나온 이진록(李進綠.변호사)검사 등 세명을 포함한 검사 11명이 소환된 인사 11명을 1대 1로 조사했다.

목사와 신부들을 조사하면서 나는 정부와 종교계가 정면으로 대립하는 사태가 올 것을 염려했다. 그런데 조사를 총괄 지휘하면서 나는 마음을 놓았다. 조사를 받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기들의 경솔함을 인정하였고 성명서 채택 과정에서도 내용의 과격함을 지적하며 시정과 발표 보류를 요청했던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신부들은 성명서 내용의 과격함을 강력히 지적했으나 일부 과격 단체에서 전체의 동의없이 성명서 발표를 일방적으로 강행한 것도 밝혀졌다.

몇 명을 사법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부드러운 결말을 보게 되어 무엇보다 기뻤다.

정치근(鄭致根)검찰총장, 서동권(徐東權)대검차장, 정해창(丁海昌)서울검사장 등은 사건을 조사중일 때 이틀간이나 자정이 넘도록 퇴청을 하지 않고 대기했으며 鄭총장은 수시로 나를 불렀다.

기자들이나 외부에는 퇴근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인지 내가 보고하러 총장실에 올라가 보면 鄭총장은 집무실 전등을 끄고 캄캄한 방에 않아 있었다. 때문에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한채 보고를 했다.

수사결과 발표상황을 보도한 신문에 난 사진을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발표를 마치고 나오자 정해창 검사장이 "오늘 공안부장 옆에 배석한 안강민 검사는 풍채가 좋아서 마치 외부기관에서 나온 감독관 같더라"는 농담을 했다. 지금도 당시 당시 발표장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 정해창 검사장의 농담이 생각나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어찌됐던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를 지켜 본 언론과 종교계 등에서는 구속이라는 법률적 처단보다도 동참을 위한 포용과 관용으로 끝났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안부 검사실로 꽃바구니를 보내 준 시민들도 있었다.

만일 오늘날 똑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야가 서로 상반된 입장에서 며칠간 성명전이나 펼칠게 뻔해 보인다.

당시 성명서 사건 처리에서 얻은 교훈이지만 힘을 가진 측에서 어느 정도 포용하고 양보하면 세상이 훨씬 아름답고 조용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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