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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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양이 분명히 말하였음에도 염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염문은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미 소인의 목숨은 도독 나으리의 것이나이다."

"하면."

김양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대는 이제 내가 가는 곳이 그 어디라 할지라도 나를 따라 나설 수 있겠는가."

"여부가 있겠나이까."

염문은 단숨에 대답하였다.그리고 나서 말을 덧붙였다.

"하오나 소인이 그러할 수 없음을 나으리께오서는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시나이까."

"그것이 무엇이냐."

"도독 나으리."

염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소인은 대역죄인이었나이다.사람을 죽인 살인범이었고,또한 국법을 어겨 노비를 매매하였던 강상죄인이었나이다."

"내가 그대의 죄를 면천(免賤)시켜줄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그대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평민의 몸이 되었음이다."

지방장관이었던 도독은 그 관할 내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생사 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도독이었던 김양은 얼마든지 죄인의 신분을 면하고 자유로운 평민으로 복권시켜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오나."

당연히 기뻐해야 할 염문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도독 나으리께오서 소인을 면천시켜 이 몸이 죄수의 몸에서 자유롭게 풀려났다 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따로 또 남아있나이다."

"그 굴레가 무엇이냐."

"그것은 도독 나으리, 소인의 얼굴에 받은 묵형이나이다. 소인은 자자형을 받아 얼굴 중앙에 글씨를 새겨 넣었나이다. 이 글자는 그 무엇으로도 지워질 수 없나이다.따라서 도독 나으리께오서 소인을 면천시켜 주신다 하더라도 신은 그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나이다."

"그대가 내 앞에서 방상시의 탈을 쓰고 있음은 얼굴에 새겨 넣은 묵형 때문이냐."

김양이 묻자 염문이 대답하였다.

"바로 그러하나이다."

"벗어라."

김양이 단호하게 명령하였다.

"그 방상시의 탈을 벗어버려라."

추상과 같은 김양의 명령에 잠시 멈칫거렸지만 염문은 그냥 그 자리에 꿇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벗으라고 명하시지 않았더냐."

옆에서 지켜보던 김양순이 재차 권하였다. 그러자 염문이 흐느끼며 말하였다.

"도독 나으리께오서 이미 죽어 관속에 누운 시신의 얼굴을 굳이 보실 까닭이 있으시나이까. 귀신의 얼굴을 굳이 보시려 할 까닭이 없지 않으시나이까."

"벗어라."

다시 김양이 명하였다.

어쩔 수 없이 염문이 탈을 벗기 시작하였다. 탈을 벗자 염문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 차마 남에게 얼굴을 드러낼 수 없어 낮이고 밤이고 탈을 쓰고 있어서인지 염문의 얼굴은 마치 나병에 걸린 사람의 얼굴처럼 문드러지고 무너져 있었고, 묵형을 지우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썼던 상처들이 곪고 썩어 심한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이것이 소인의 얼굴이나이다."

울면서 염문이 말하였다. 김양은 물끄러미 염문의 얼굴 중앙 이마의 한가운데 새겨진 글자를 바라보았다.

'盜賊'

또렷이 새겨진 그 글자는 염문의 탄식대로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각인되어 있었다. 그 두 글자가 각인되어 있는 한 김양이 법적으로 면천시켜 준다고 하더라도 염문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음이었다.

"나으리."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서 염문이 부르짖었다.

"다시 탈을 쓰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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