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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인생이 '관리' 받는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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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도시백서
이신조 지음, 열림원, 344쪽, 9500원

장편소설 『기대어 앉은 오후』로 제4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소설가 이신조(30)씨의 두번째 장편소설 『가상도시백서』는 가상도시와 그 구성원들의 삶에 관한 얘기다.

대형 할인마트나 놀이공원·박람회장처럼 한날 한시를 기해 개장(開場)한 소설 속 계획도시의 이름은 만토(晩土) 또는 망토(Manteau). 만토는 수십년간 국경을 마주하고 전쟁을 치른 ‘제국’과 ‘공화국’이 합쳐져 탄생한 신생 연합국이 만든 도시다. 과거 적대적이던 두 나라가 합쳐진 후 생겨나는 곤란한 문제들을 조속히 또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행정지원 위성도시인 것이다.

만토에서의 삶은 철저하게 관리되고 통제된다. 우선 거주자 수가 11만3075명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유지된다. 추방관련 조항은 87가지나 된다. 26세 이상 45세 이하의 남·녀만 시민으로 선발될 자격이 있으며 독신·기혼 여부는 상관없으나 아이가 생기면 추방당한다. 능률과 속도를 위해서는 출산·육아·교육 등은 짐만 될 뿐이다. 선발 과정도 까다롭기 짝이 없다.

면접과 테스트만 다섯번씩, 모두 열차례를 통과해야 하고 정신분석도 받아야 한다. 도시 중앙광장에 자리잡은 거울탑이라고 불리는 시 청사(廳舍)는 대부분의 다른 건물들이 20층 이하인데 비해 40층으로 유일하게 우뚝하다. 어쩐지 미셸 푸코가 얘기했던 팬옵티콘(원형감옥)의 감시탑을 연상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거울탑 중앙의 거대한 컬러 전광판에는 만토시의 정확한 현재 거주자 숫자와 함께 ‘두번째 목요일 검은 냉장고에 흰 안테나 설치 예정’같은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아는 사람만 해독할 수 있는 ‘암호문’이 쉴새 없이 공지된다. 만토시 외곽으로 전화를 걸려면 사람들은 자신의 시민번호를 먼저 입력해야 하는 공중전화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음식점의 테이블 수는 10개 이하로 제한되고 더없이 합리적이고 위생적인 공창(公娼)제도도 있다.

작가는 유토피아 또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의 관심은 사회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이나 가능성·한계를 짚기보다는 구성원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모두 10개의 장으로 이뤄진 소설의 세번째 장부터 주요 등장인물 일곱명의 내면 세계가 차례로 소개된다. 그런데 한 여자와 여섯 명의 사내로 구성된 일곱명은 시의 유흥구역인 D구역의 ‘스노우 화이트(백설)’라는 이름의 바에서 처음 만났다. 3장부터 8장까지, 또 마지막 10장에는 ‘첫번째 난쟁이’‘두번째 난쟁이’…‘일곱번째 난쟁이’ 등의 부제가 붙는다. 백설공주 동화를 패러디한 것이다.

부제가 아닌 각 장의 본 제목들은 ‘기대(3장)’‘경외(4장)’‘질투(5장)’‘견제(6장)’‘묵과(7장)’‘의지(8장)’‘사랑(10장)’같은 것이다. 일곱명의 주인공이 극단적인 통제에 맞서 보이는 행동 양상 또는 통제에 적응한 결과 얻게 된 행동 철학들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가령 4장의 주인공인 치안요원 나윤은 연합국 수도에서 시찰 온 치프들을 경호하며 개 경주장에 따라갔다가 개경주는 적당한 만족과 적당한 낭패를 제공할 뿐인, 투견에 비하면 너무 매끈한 오락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들은 자신들을 달리도록 유인하는 토끼의 목덜미를 결코 낚아챌 수 없다. 그나마 토끼도 가짜다. 개경주는 한계나 틀 안에서 벌어지는 안전한 게임인 것이다.

한편 시립미술관의 미술품은 온통 복제품이다. 역시 가짜들이다. 때문에 나윤은 진짜를 경외하게 된다. 그 결과 나윤은 세번 이상 같은 여자를 부르면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기고 ‘아우라(진품의 독특한 분위기)’라는 이름의 콜걸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콜걸도 결국 만토시에서 허용한 제도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나윤은 만토시의 틀을 부수고 나가지 못하는 난쟁이이다.

결국 소설이 제시하는 만토시의 모습과 그 구성원들의 삶은 ‘지금 여기, 우리’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작가는 묻는다. 우리들의 삶은 만토와 얼마나 다르냐고. 행복하느냐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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