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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비우고 나누고 하나 되면 세상이 훈훈해집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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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지음, 문학과지성사, 116쪽, 6000원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박남준 지음, 문학동네, 98쪽, 5000원

단 한사람
이진명 지음, 열림원, 150쪽, 6000원

시집을 읽는 날은 마음이 설렙니다.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면 절로 행복해집니다. 저는 맨 얼굴로 다가와 살며시 마음을 껴안아 주는 시를 좋아합니다. 그런 시를 만나면 금방 마음이 데워집니다.

여기 소개하는 시집 세 권은 저를 이 땅에 살고 있어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시집들입니다. 서로 개성이 다르고 사는 모습이 다른 시인들의 시집인데도 행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지요. 우리 모두에게 손에 잡히는, 더 많은 행복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이 시집들을 소개합니다.

#1 나희덕의 시집 『사라진 손바닥』

나희덕의 시 ‘그림자는 어디로 갔을까’를 읽으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해맑은 이 사람에게도 현실은 무겁구나, 싶어서죠. 그렇지만 나희덕은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아침마다 서둘러 출근을 하지만/ 그림자는 집에 있다/ 그를 두고 나오는 날이 계속되고/ 거리에서 나는 활짝 웃는다// 그림자 없이도/ 웃는 법을 익힌 뒤로는/ 내 등 뒤에 그림자가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겨울날 저녁 그 그림자는 맨발로 집을 나가 버리고 ‘나’는 그림자를 기다립니다. 그 그림자는 나의 본 모습이거나 나의 일부를 상징합니다. 현실 앞에서 그것조차 버리는 거지요.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현실을 떠날 수 없는 나희덕은 적응하기 위해 고육지책을 쓰고 있습니다.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양보할 건 양보하고 포기할 건 포기하며 살아갑니다.

나희덕은 다른 시 ‘북극성처럼 빛나는’에서 ‘가마우지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모여 사는 것은/ 서로 사랑해서가 아니다/ 포식자의 눈과 발톱을 피하기 위해/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떼를 지어 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이 바위를 희게 만들었다’고 노래합니다. 생존이 행복에 앞서는 가마우지의 사회와 사람의 사회를 같다고 단정 짓지요. 나희덕은 치열한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은 각자가 그만큼 치열하게 찾아가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참 모진 사람입니다.

나희덕은 ‘풍장의 습관’에서 ‘책상 위의 석류와 탱자는 돌보다 딱딱해졌다./ 향기가 사라지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그들은 향기를 잃는 대신 영생을 얻었을지/ 모른다고,’ 합니다. 존재를 박제한 후에야 안심이 된다는 나희덕은 양보나 포기의 차원을 넘어서서 적극적인 희생의 차원으로 들어섭니다. 나희덕처럼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의 행복을 먼저 펼쳐놓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점점 더 따뜻해지겠지요. 물론 희생하는 사람도 행복해야겠습니다. 행복은 오고가야 하는 법. 받기만 하는 행복은 부담스럽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희생할 때, 행복도 온전해지고 더 커질 겁니다. 또 다른 행복을 찾아 다른 시집을 펼쳐 봅니다.

#2 박남준의 시집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북섹션 표지에 실린 시 ‘동지 밤’은 박남준이 전주의 모악산 외딴 기슭에서 혼자 살 무렵 쓴 시입니다. 산중 생활에 낮이 따로 있고 밤이 따로 있을 턱이 없지요. 눈이 오는 거나 누가 오는 게 별 다를 것도 없고요. 날이 밝아도 여전히 심심할 뿐. 그러나 심심해도 혼자 행복하면 그만인 게지요. 이런 행복은 바라보는 이에게 미소를 짓게 만들지만 온기까지 전해주진 못합니다.

올 봄부터 박남준은 산에서 내려와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의 일원으로 방방곡곡을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3년 예정의 순례길입니다. 산에 홀로 살던 박남준이 세상으로 나와 있는 이유는 ‘흰나비 떼 눈부시다’라는 시를 보면 알 듯 합니다. ‘나 지금껏 꽃 피고 꽃 지는 일만 생각했구나/ 꽃 피고 꽃 지는 일만 서러워했을 뿐/ 꽃이 피고 그 꽃이 진 자리/ 오랜 상처를 앓고 난 후에야 두 눈이 깊어지듯이/ 등불처럼 내달은 열매를 키워간다는/ 참으로 당연한 이치도 몰랐던가’ 여기가 박남준의 행복이 소승적 차원에서 대승적 차원으로 환골탈퇴 하는 순간인 듯 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꽃과 열매는 서로에게 그림자가 되어줍니다. 꽃이 피고 지는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함이고 열매는 다시 꽃을 피우고 지게 만들잖아요. 그에 비해 우리는 바삐 사느라 남의 그림자는 물론 자기 그림자도 쳐다 볼 틈이 없습니다. 왜 바쁜지를 모르면 왜 사는지를 잊고, 왜 사는지 모르면 왜 행복해야 하는지도 모르지요.

박남준이 산중에 칩거하면서, 국토를 순례하면서 찾으려 했던 건 먼 데 있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하는 일과 남을 위하는 일이 바로 꽃과 열매 사이처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거라는 깨달음이었죠. 내가 남이고 남이 나라는 마음, 내가 남의 그림자고 남이 나의 그림자라는 박남준의 마음을 훔쳐보면서 행복에 대한 또 다른 희망을 가져 봅니다.

#3 이진명의 시집 『단 한 사람』

이진명의 시 ‘단 한 사람’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가스레인지 위에 눌어붙은 찌개국물을 자기 일처럼 깨끗이 닦아줄 사람은/ 언제나처럼 단 한 사람/ 어젯날에도 그랬고 내일날에도 역시 그럴/ 너라는 나, 한 사람’ 이진명은 ‘너라는 나’는 결국 나이고 그 나는 단 하나 뿐인 존재라고 합니다. 이어서 ‘우리 지구에는 수십 억 인구가 산다는데/ 단 한 사람인 그는/ 그 나는/ 별일까 진흙일까’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는 ‘그’와 ‘나’가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너=그’라는 등식이 이뤄집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별과 진흙까지 그 등식에 포함하려 합니다.
이진명에게 생명은 하나이므로 생명이 행복하려면 모두가 행복해야 합니다. 이진명은 사람은 물론 미생물까지 품에 안고 가려 합니다. 이진명의 마음의 눈에는 각각 다른 생명들이 모두 ‘나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이진명의 시 ‘죽집을 냈으면 한다’의 일부분을 읽어드리지요. ‘거리거리마다/ 온갖 생고깃집 주물럭집 수산횟집이 난장을 치는 사이로/ 가만히 가만히 끼어서라도/ 죽집을 냈으면 한다’ 이진명은 ‘길에 지친 행인들의 쓰린 속’을 보면서 ‘세상의 폭력’을 봅니다. 그저 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 죽집을 내서 쓰린 속을 달래주려 합니다. ‘소매를 잡아 끌어서라도’속 쓰린 사람에게 죽을 먹이려 합니다. 행인들의 속이 쓰리면 자기 속이 쓰리고, 행인들의 속이 편해지면 내 속도 편해질 거라는 마음입니다. 내가 행복하려면 나서서 남부터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는 거지요. 남이 행복하지 않으면 나도 행복할 수 없다는 적극적인 표현이고요. 생명이 하나인 것처럼 행복도 하나로 이어져 있으면서 각각의 행복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이진명의 마음을 읽다보니 저도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세 시집을 행복이란 끈으로 묶어서 읽고 나니 슬픔은 나눌수록 줄어들고 기쁨은 나눌수록 늘어난다는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제가 손에 쥐고 있는 행복이 얼마인가 살펴보게 되고요. 이제, 저도 행복을 늘리기 위해 보잘 것 없는 행복이나마 먼저 나눠줘야겠습니다. 그리고 행복에도 불행이란 그림자가 있는 듯 합니다. 꽃과 열매의 사이처럼요. 행복하니까 불행하게 될 수 있고, 불행하니까 행복하게 될 수 있는 거겠지요. 모쪼록 행복하기 바랍니다.

거제도 저구마을에서=이진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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