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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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 김양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객(刺客).

그렇다. 김명을 선수로 제압하는 방법은 오직 자객뿐인 것이다. 김명을 죽이기 위해서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어차피 현명한 일이 아니다. 일찍이 『사기(史記)』를 쓴 태사공(太史公)도 『자객열전(刺客列傳)』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자서(自序)하지 않았던가.

"조말(曹沫)의 비수(匕首)로 노나라는 잃었던 영토를 다시 찾고,제나라는 맹약에 거짓이 없음을 밝혔다. 예양(豫讓)의 의로움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래서 자객열전을 쓰기 시작한다. "

조말은 노나라의 장공이 고용하였던 자객. 노나라와 제나라의 싸움을 비수 하나로 제압하여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게 했던 자객이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김명을 제압하기 위해서 군사를 동원한다는 것은 노나라와 제나라가 서로 영토를 빼앗기 위해서 전면전을 벌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조말과 같은 자객의 날카로운 비수만 구할 수 있다면 손쉽게 원수를 제압할 수 있다.

구유밀 복유검(口有蜜 腹有劍).

옛말에 이르기를 '입속에는 꿀을 담고,뱃속에는 칼을 지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말이야말로 김명을 제압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천하의 세도가이자 천하장사인 김명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입 속에는 꿀을 담아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그의 입에 꿀을 넣어줄 것이요. 한편으로는 뱃속에 칼을 지녀 꿀에 탐닉하는 김명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일인 것이다.

자객.

주군, 또는 주인의 원수를 대신 죽여주는 사람.

일찍이 중국에서는 주군으로부터 정신적.물질적 은혜를 입은 사람이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또는 보수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그의 원수로 여겨지는 권력자를 죽이는 자를 자객이라 하였는데 때론 협객(俠客)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순간.

김양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2년 전에 있었던 악공인 염문 사건이었다. 청해진 대사 장보고와의 친교를 위해 자신의 영토 내에서 월권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압송토록 허락하였던 김양이었지만 그는 보고서를 통해 염문의 죄상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 염문의 놀라운 검술에 감탄했었다. 장보고의 부하 이창진이 끌고 온 수십명의 군사들이 단 한사람의 해적 염문을 당해내지 못하여 마침내 투망질을 하여 그물로 염문을 생포하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선 자리에서 공중으로 솟아올라 단칼에 목을 찔러 군사의 목숨을 빼앗았던 검술의 달인이라는 이야기까지 김양은 염문에 대한 죄상을 상세히 듣고 있었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만이 또 다른 사람의 목숨을 쉽게 뺏을 수 있다. 염문은 이미 사람을 죽인 살인자일 뿐 아니라 잔인무도한 해적이었으며,무고한 사람들을 노비로 팔아넘기는 인간백정이었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피리를 들고 백제악을 연주하던 악공인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잔인한 살인자와 예술가로서의 감수성,거기에다 여우와 같은 교활함까지 갖춘 살인병기인 것이다.

사마천이 쓴 『자객일전』에서 예양은 자기를 인정해 주었던 지백(智伯)을 위해 이렇게 탄식하고 있었다.

"아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마찬가지로 염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염문은 충분히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김양은 또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해적 염문이 장보고에 의해서 참형되지 아니하고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을. 비록 살아서 돌아오긴 하였으나 그 얼굴에 자자형을 받아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고,죽어도 죽은 목숨이 아닌 중음의 귀신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김양은 순간 이를 악물고 소리를 내어 중얼거려 말하였다.

그렇다.

염문이야말로 또 하나의 귀한 보물인 것이다. 일찍이 김균정과 그의 아들 김우징을 '아주 귀한 보물이니 투자할 만하다'하고 기화가거(奇貨可居)하였던 것처럼 바로 이 순간 김양은 염문을 또 하나의 귀한 보물로 삼을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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