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칼럼] 읽기 쉽게 만든 '선거, 희망을 뽑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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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새해 첫날, 1면 머리에 10대 국가과제가 내걸렸다. 그런데 이같은 어젠다 설정을 위해 '지난 1년여 동안 국내외 전문가와 연구기관, 독자들의 의견을 듣는 동시에 독자적인 조사.연구작업을 벌였다'는 말에 공감이 가질 않았다.

중앙일보가 선정한 10대 과제는 ▶대통령, 제왕에서 CEO로▶예산 1% 대북지원에 쓰자▶시위문화-남에게 피해 없이▶보육시설 두배로▶고시(考試)제 확 바꾸자▶매연 줄여 맑은 공기를▶철길을 되살리자▶노인에게 일자리를▶생활외국어를 익히자▶21세기형 관혼상제를 등이다.

우선 선정되기 이전에 어떤 것들이 후보에 올랐으며, 그들 중 이 10개가 선정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해설이 필요했다. 특히 여성, 장애인, 성적 소수자 관련 사안 등 한국 사회를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장애가 되는 편견과 차별의 문제가 선정되지 않은 것엔 어떤 이유가 있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어야 했다.

지난해 우리 사회를 흔들었던 크고 작은 이슈들 중에는 우리가 다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할 '과제'라 할 만한 것이 꽤 있었다.

그 중 여성 관련 이슈들을 뽑아 본다면 여성부 출범, 청소년 성 매매범 신상공개, 간통죄와 사후피임약 허용에 대한 공방, 평등한 명절문화 가꾸기에 대한 언론의 대대적인 홍보 등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여성 관련 이슈들은 지난해뿐 아니라 올해에도 지면을 채우는 주요 목록이다. 이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성평등을 가로막는 장애가 많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애인들에게는 이동권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태이며,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벽도 여전히 높다. 그뿐이랴. 예년보다 훨씬 늘어난 대졸 실업자, 파행적인 교육정책, 요금은 올라도 서비스는 달라진 것 없는 택시, 공직자 비리 등 난제가 산적해 있다.

1월 4일자 '베터 라이프'에는 한국인 남편을 둔 외국인 주부들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독일 며느리가 떡국을 대접해 시부모의 사랑을 받고, 미국 출신 주부는 시댁의 행사에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와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 성장한 여성들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서 사는 모양새가 우리와 크게 달라 보이질 않는 게 아쉬웠다. 개인의 권리와 사생활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이들이 떡국 끓이기와 시댁 행사 안 빠지기로 우리의 가족문화에 적응하는 모습만을 부각하기보다는 '사생활'을 지키기 위한 숨은 노력들도 좀 더 캐물어 주었더라면 '베터 라이프'라는 제목에 더 걸맞은 내용이 되지 않았을까.

그밖에 1일자 '영화로 보는 세계경제-중동전쟁, 석유의 정치경제학'과 '선거, 희망을 뽑자' 섹션은 자칫 무겁게 흐르기 쉬운 정치.경제 분석기사의 틀을 벗어나 읽기 쉽게 만든 참신한 의도가 돋보였다.

'중동전쟁, 석유의 정치경제학'은 석유자원을 둘러싼 서방세계의 암투를 통해 석유와 국제정치의 상관관계를 쉽게 설명해줬다. '월드컵 친절하고 당당하게' 시리즈도 외국인의 입장에서 현장을 점검해 보는 시각이 신선했다.

새해 첫날 '이어령의 새해에 띄우는 글'은 잊혀져 가는 '덕담'을 복원해야 할 이유들을 따뜻하게 풀어냈다. 하지만 여유있게 건네는 덕담 한마디는 '여유 있는 삶'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집값은 치솟고 대중교통은 서민의 하루를 고달프게 하며 실업자가 늘어나고 있는, 나라 바깥에서는 포성이 끊이지 않는 2002년 벽두에 '더 이상 미워하지 말자.정치가도 기업인도, 시인과 소외된 모든 이들이 서로 덕담을 나누며 살아가는 2002년의 한국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쳐보자'는 노교수의 '덕담'이 왠지 메아리 없는 외침인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다.

이숙경 웹진 줌마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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