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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심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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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초(楚)의 항우가 한(漢)의 유방에 쫓겨 해하(垓下)에 포위된다. 만감이 교차하며 잠 못 드는 밤, 구슬픈 노랫가락이 들려온다. 초나라 노래다. 사방을 에워싼 한나라 군사들 속에서 흘러나온다. 항우는 “한이 이미 초를 점령했단 말인가” 하며 탄식하고, 사기가 꺾인 군사는 지리멸렬한다.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연원이자 ‘심리전’의 백미(白眉)다.

현대전에서도 심리전은 필수 요소다. 대표적인 것이 라디오 선무(宣撫) 방송. 태평양전쟁 때 미군은 NHK를 통해 들려오는 여인에 미혹됐다. 미군의 얼굴 없는 연인, ‘도쿄 로즈’다. 미국 국적이었던 그녀는 종전 후 반역죄로 처벌된다. 베트남전쟁 때는 ‘하노이 한나’가 있었다. “투훙(가을 향기)입니다”로 시작하는 그녀 역시 미군의 마음을 흔들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서 의미 없이 죽어가고 있다”는 달콤한 목소리가 총포보다 강력했다는 평가다. 본명은 찐티응오로, 종전 후 1급 훈장을 받는다. 6·25전쟁 때는 ‘삐라(전단)’가 주요 심리전 도구였다. 백선엽 회고록에 따르면 유엔군이 뿌린 삐라는 1000여 종에 25억 장이었다고 한다. 보통 엽서만 한 크기로, 한반도를 20번 덮을 수 있는 양이다. 쌀밥에 조기구이 그림을 그려놓고 “유엔군으로 넘어와 배부르고 안락하게 생활한다”는 유혹, “중공군은 좋은 무기, 북한군은 못쓸 무기를 준다”는 이간질, “항복하면 살려준다”는 심리교란이 주 내용이다.

삐라는 휴전 이후에도 계속된다. 냉전시대 남북 간 ‘소리 없는 종이 폭탄’인 셈이다. 서로 ‘잘 먹고 잘 산다’는 체제선전이 주류다. 1980년대 중반 북으로 날린 삐라에는 배우 원미경의 사진에 ‘의거 월남’ 보상금으로 황금 80만7700그램을 제시한다. 이에 북한은 춤추는 여인의 그림과 함께 사병 1억1100만원, 장성은 3억3300만원을 준다고 응수한다. 그런데 효과는 있었나.

말로 하는 심리전도 있다. 삼국지에는 욕설로 상대편 장수의 마음을 흔드는 장면이 많다. 소위 격장지계(激將之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서도 신라와 백제 간 욕설전이 질펀하 다. 확성기는 이런 심리전의 현대적 도구랄까. 10㎞ 이상 떨어진 적의 귀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정부가 천안함 폭침 대응으로 심리전 재개를 선언하자 북한이 협박으로 맞선다. 마치 ‘치킨게임’ 형국이다. 손자병법 군쟁(軍爭)편은 ‘부대는 사기를, 장수는 심리를 빼앗으라(三軍可奪氣 將軍可奪心)’고 했다. 남북은 현재 심리전 중이다.

박종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