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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문화 지도] 1. 영화계 슈퍼파워-강우석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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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신년을 맞아 새 기획물 '대중문화지도'를 선보입니다.

대중문화는 말 그대로 당대를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접하는 온갖 창작물을 일컫습니다. TV드라마.만화.가요.영화.인터넷…. 대중문화는 대개 일상의 고단함을 잊는 오락의 형태로 생산.유통되지만 그런 범속함이야말로 시대정신의 앙금일지 모릅니다.

최근엔 뮤지컬.오페라.클래식 같은 소위 고급문화도 대중들과 호흡하기 위해 변신을 꾀하기도 합니다. 이에 작금의 대중문화는 어떤 지형을 이루고 있는지 짚어보려 합니다. 대중문화를 전면에서 주도하는 이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대중문화의 현대적 양상은 어떤지를 탐험해 갈 것입니다.

지난해 12월 28일 오후 서울의 한 극장. 오는 25일 개봉하는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 시사회가 열렸다. 기자와 극장.영화사 관계자들이 주로 초대된 이날 시사회장에 '귀한 손님'이 눈길을 끌었다. 임권택 감독의 신작 '취화선'(조선시대 화가 장승업의 생애를 다룬다) 팀이 참석한 것이다.

임감독을 비롯해 태흥영화사 대표 이태원, 촬영감독 정일성, 주연배우 최민식 등이 한꺼번에 시사회를 찾은 건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라 할 만했다. 막바지 촬영에 한창일 이들이 힘들게 짬을 내 극장을 찾은 건 바로 강우석 감독이 '취화선'에 전액 투자했기 때문이다. 약 60억원으로 예상되는 적지않은 제작비를 강 감독이 선뜻 대기로 한 데 대한 보답이었던 것이다.

강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건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이후 만 3년반 만이다. 그 공백기 동안 그는 감독으로서보다는 영화제작.투자자로서의 기반을 든든히 다지는 데 힘을 쏟았다. 이 기간은 정부가 영상진흥정책에 예산을 집중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덩달아 금융권 자본이 몰려든 시기와 일치한다. '친구'로 대표되는 지난해의 영화 열풍은 그렇게 뿌린 씨앗이 활짝 꽃을 피운 결과였다. 강감독이 대주주로 있는 ㈜시네마서비스도 그 과실의 수혜자였다. 외국자본(워버그핀커스)을 2백30억원 가량 끌어들였고 벤처기업인 로커스 홀딩과 제휴해 1백50억원의 자본금을 추가로 조성했다.

강감독이 몇년 째 '영화계 파워 1인자'로 손꼽히는 것은 그가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와 같은 시스템을 구축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유니버셜 스튜디오 같은 회사를 만드는 게 꿈"이다. 즉 시네마서비스를 모회사로 삼아 영화 제작-유통의 전과정을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의 힘만으로 굴러가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 꿈을 손에 잡을 날이 머지 않아 보인다. 우선 그는 경기도.강원도 지역에 약 30개의 스크린을 소유하고 있고 부산.대구.광주.전주 등지에도 멀티플렉스를 갖고 있다. 영화를 유통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다. 최근엔 사재(私財)를 털어 자체 스튜디오를 짓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문제는 유통망을 틀어쥐려면 소프트웨어, 작품이 많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영화 제작에 주력한다. 1년반 전에 시네마서비스 대표직을 물러나 경영에서 손을 떼고 영화 제작에만 몰두하기로 한 것도 그같은 맥락이다.

제작과 관련해 그는 영화계에서 흔히 '강우석 사단'이라고 부르는 그룹을 소중히 여긴다. 그는 특히 같이 일해 온 사람을 중용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의 주변에 모인 이들을 '사단'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뜻으로 부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주유소습격사건''선물''신라의 달밤' 등 히트작을 잇따라 내놓은 좋은 영화사 대표 김미희씨. '투캅스'를 만들 때 강우석프러덕션 기획실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는 강감독과 9년째 연을 맺어오고 있다.

"강감독은 감독 출신으로 애초에 맨손으로 출발한 사람이다. 다른 메이저 영화사처럼 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오늘의 시네마서비스를 키운 게 아니다. '투캅스'에서 번 돈을 종자(種子)로 삼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영화를 알고, 영화에 애정이 깊다는 점때문에 그와 계속 일하게 되는 것 같다."

최근 한국영화 전문배급사 겸 제작사로 출범한 청어람의 대표 최용배씨는 시네마서비스에서 5년간 배급을 담당하다 독립했다. 그는 10년 전 대기업이 영상산업에 뛰어들었던 시절 대우에서 강감독을 처음 만났다.

"강감독이 대우로부터 '마누라 죽이기'의 투자를 받기 위해 자주 접촉했는데 그 때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 같다. 그 무렵 그는 돈에 구애받지 않고 감독이 자기 구상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아쉬워했다."

때문인지 강감독은 감독이 제작사를 겸하는 형태를 선호하고 적극 권장한다. 강감독 아래서 조감독을 지낸 인연으로 '투캅스3'을 연출하고 '주유소 습격사건''신라의 달밤'을 만들었던 김상진 감독은 지난해 강감독의 권유로 '감독의 집'이라는 영화사를 차렸다.

"영화는 헝그리 정신으로 하는 게 아니다. 편안한 환경에서 만들어야 좋은 영화가 나온다. 감독이 영화사를 겸하면 창작에 전념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는 많은데 돈이 없어 동분서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또 영화사를 갖고 있으면 연출료만 받는 것보다 영화의 수익을 나눌 때 유리한 면도 있다" 는 게 강감독의 지론이다.

그래서 '찜''하루'의 한지승 감독 (영화사 시선), '간첩 리철진''킬러들의 수다'의 장진 감독(영화사 수다)으로 하여금 지난해 영화사를 차리도록 했다. '접속'의 장윤현 감독과는 '텔미 썸딩' 등에 투자하면서 4년째 협력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시네마서비스가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에 전액 투자하기로 한 것도 감독이야말로 영화의 중심이라는 강감독의 고집 때문이다. 특히 "어른이 거의 없는 영화계에서 임감독은 지극히 소중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취화선'의 전액 투자에 대해서는 영화계도 놀라는 눈치다. 상업영화의 범주에 넣기 힘든 '취화선' 같은 작품에 선뜻 투자한 건 역시 강감독의 변화된 모습이다. 자본이 넉넉해지면서 이익에 급급하지 않는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게다가 이제 단지 한 회사의 책임자로서가 아니라 한국영화의 장래를 조망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얼핏 보인다.

그러나 강감독과 협력관계에 있는 영화사들은 '사단'이라는 표현을 마땅찮아 한다.마치 패거리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부에서는 이들을 '배타적'이라며 곱지않게 보는 시선이 있다. 이에 대해 시네마서비스의 투자로 '서프라이즈'를 제작 중인 시네2000의 이춘연 대표는 고개를 젓는다. "그런 시각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모인 것이지 무슨 강제적인 계약에 묶여 있는 게 아니다. 각자 필요하면 언제든 다른 투자사와 손잡고 일할 수 있다.하지만 지금은 이 시스템이 좋기 때문에 서로 도와 가면서 지내는 거다."

어떤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강감독이 간섭을 많이 하는 걸로 바깥에 알려져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자기 의견을 제시하긴 하지만 수용하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감독 개인에게 달렸다. 옆에서 지켜보면 알겠지만 그는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다"며 두둔했다. 김미희 대표는 "돈 끌어오느라 신경쓸 필요없이 괜찮은 콘텐츠만 개발하면 되니까 작품에 전력투구할 수 있어 좋다"며 장점을 늘어 놓았다.

2002년 영화계 흥망은 그들 어깨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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