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무정부상태로 치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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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폭력시위가 재발하고 임기 내각이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아르헨티나 정국이 다시 급속도로 불안해지고 있다.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이 물러난 뒤 진정돼 가던 시민들의 불만이 대법원의 예금인출 제한 판결에 다시 끓어오른 것이다.

이런 위기상황에서도 정치인들은 내년 3월 초 대선을 앞두고 정쟁에만 골몰,정치 불신을 키우고 있다.

◇ 유혈시위 왜 또 일어났나=최근 한 시민이 만기가 된 정기예금 20만달러를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냈다. 이달 초 정부는 은행예금 인출 한도를 1인당 한주에 2백50달러로 제한했었다. 이 소송에서 하급 법원이 원고측 손을 들어주자 대법원이 즉각 이를 무효화했다. 여기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예금인출 제한조치는 전임 대통령 시절인 이달 초 취해진 조치지만 지금도 유효한 상태다. 은행의 환전 업무도 달러를 페소로 바꾸는 것만 가능하고, 페소를 달러로 바꾸는 것은 여전히 금지돼 있다.

시민들은 특히 달러나 페소로 맡긴 예금을 1월 중순께 발행될 새 화폐인 '아르헨티노'로 찾도록 하겠다는 정부의 복안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페소와 달리 새 화폐는 달러와 교환되지 않아 언제 가치가 폭락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시위는 대체로 중산층이 주도한 것이어서 약탈사태는 거의 없었다.

◇ 정치불신 극에 달해=시민들은 여당(페론당)은 부패하고, 야당(라디칼당)은 무능하다고 비판한다. 특히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시절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카를로스 그로소가 새 정부에서 중책을 맡은 것에 대해 불만이 컸다. 결국 그는 이번 시위로 물러났다.

페론당은 대선주자들이 난립, 분열양상을 보이고 있다.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 대통령은 3개월짜리 임시 대통령에 머물지 않겠다는 욕심도 내비치고 있다. 내친 김에 전임 대통령의 남은 임기인 2003년 말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페론당 총재인 메넴 전 대통령도 이런 입장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메넴은 세번 연속 대통령을 할 수 없다는 규정에 묶여 이번 대선에 출마할 수 없는 만큼 정치적 입지가 약한 사가 대통령 자리에 남아 있는 게 차기 선거에서 유리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대선주자들은 물론 이런 움직임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한편 페론당은 대선에서 쉽게 이기기 위해 선거법을 개정해 큰 비난에 직면해 있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아니라 한 정당에서 여러 명의 후보가 나온 경우 정당별 득표를 합산하고 그 안에서 최다 득표자가 당선되도록 한 것이다. 예컨대 야당 후보가 30%를 득표한 가운데 여당의 A후보가 20%, B후보가 15%,C후보가 10%를 득표하면 A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식이다.

◇ 외국기업과도 마찰=정부가 과거 국영기업을 해외에 매각하면서 허용한 불리한 조항을 지금와서 수정하려 하자 외국 기업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 전화.전기.가스.수도 등 주요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면서 새 주인(대부분 외국기업)에게 페소가 아닌 달러로 요금을 거둘 수 있도록 했다. 지금까지는 '1달러=1페소' 환율정책(페그제)에 따라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페소화 가치가 떨어지면(평가절하) 그만큼 공과금이 인상돼 서민의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로돌포 프리헤리 재무장관은 "공공요금을 달러화로 거둘 수 있도록 허용한 계약을 믿을 수 없다. 계약 당사자인 정부와 외국기업간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공과금을 달러가 아닌 페소나 새 화폐인 아르헨티노로 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언급이다.

정부의 이런 방침이 알려지자 텔레포니카(전화).엔데사(전기) 등 스페인 기업들이 들고 일어났다. 외국기업인들은 "아르헨티나 정부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특히 달러와 교환이 안되는 아르헨티노는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채무상환 중단을 선언한 아르헨티나 임시 정부가 과거 정권이 한 약속을 그대로 인정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정완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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