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박정만 '두고가는 자리를 위하여'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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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영결종천(永訣終天) 두고 가는 자리를 위하여

사랑이여, 이제 너도 떠나가라

꽃 지고 마지막 참회나무 잎마저 지고 나면

나 또한 12월의 끝으로 떠나가리라.

무서리 하얗게 쌓인 저 대지 위에

산색(山色)처럼 깊어진 부평초 하나

목숨은 저 홀로 피었다가 저 홀로 지고

그 위에 무명의 어둠 발이 죽음을 밟고 온다.

(중략)

사랑이여,인제 너도 돌아 오라

은봉채(銀鳳釵) 꽃술 위에 바람 부는 저녁마다

밤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꿈속의 호젓한 길로

이제는 죄가 아닌 한 생의 뜻으로 돌아 오라.

인동초(忍冬草) 뿌리에도 시퍼런 날이 섰거니.

-박정만(1948~88)'두고가는 자리를 위하여' 중

회나무:노박덩굴과의 낙엽활엽교목, 잎은 둥글고 6~7월에 흑자색 꽃이 피며 열매는 10월에 익음. 은봉채:봉의 머리 모양으로 꼭지를 조각한 비녀. 부평초:다년생 수초로 늪이나 연못의 물위에 떠서 자람. 뿌리는 한방에서 발한제 해독제로 쓰임. 인동초:꽃은 향기로우며 가을에 검은 장과가 익음.

차디찬 겨울밤을 건너갈 때는 국어사전이라도 펴놓고 일삼아 풀이름 나무이름을 읽으며 견디자. 마음이 막막한 자의 경전처럼. 그 속으로 난 사랑과 죽음의 길이 가난하게 지워질 때까지.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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